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kylar Oct 24. 2021

아이고, 신이시여

이 가련한 자의 효녀병을 낫게 해 주소서

대망의 첫 중간고사 날이 되었다. 

생업과 학업을 병행하는 재학생들이 많아서인지, 어차피 집에서 온라인으로 치르는 형식이라 그런지 중간고사 시간표는 모두 한밤중 시간대에 몰려 있었다. 연이은 강의 몰아 듣기와 초치기 시험공부에 폭풍 같은 시간을 보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시험 시작 시각을 몇 분 앞두고 나는 미리 중간고사 응시 페이지를 띄워 놓았다. 약 15년 만에 처음으로 보는 '학교 시험'. 사뭇 비장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노트북 앞에서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시험 전에 기도를 하는 건 어린 시절부터의 내 오랜 습관이자 규칙 같은 거였다. 


하나님, 미흡하게나마 첫 시험 준비를 열심히 했습니다. 큰 욕심은 부리지 않지만 노력한 만큼은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세요. 그래도 웬만하면 시험을 잘 봐서 엄마 아빠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응???


뭔가 이상했다. 

나이 마흔에, 시험을 잘 보고 싶은 이유가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그렇지만 기도를 끝내자마자 곧 시험이 시작되었고, 나는 영어로 출제된 수십 개의 문제를 정신없이 풀며 '세상에서 가장 짧은 50분'을 보냈다. 코피 터지게 달린 벼락치기 공부의 효과였는지, 혹은 어설프게 보탠 기도가 힘을 발휘했는지, 다행히 별 탈 없이 시험을 마쳤다. '시험시간이 종료되어 답안이 자동 제출되었다'는 팝업창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험이 끝나서 허탈한 게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험 직전에 했던 내 기도가 다시 떠올라서 나온 한숨이었다. 내 안에 아직 다 자라지 못한, 그것도 못나고 상처 받은 어린아이가 있었구나 하는 걸 난생처음으로 깨달아 나는 마음이 아팠다.


지금도 또렷한 기억이 하나 있다. 

80년대생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구독'해보았을 학습지. 특히 수학 학습지는 '구몬'과 '재능', 이 두 브랜드가 양대산맥이었고 나는 그중 재능수학을 구독했다. 한 번은(여러 번이었을 수도 있다), 이 학습지 전체 수강생을 대상으로 한 평가시험이 있었다. 나는 방문 선생님 앞에서 시험을 열심히 치렀고, 선생님이 답안지를 수거해 갔고, 얼마 후 결과지가 집에 도착했다. 결과지에는 전체 응시생의 수, 나의 등수 등이 나와 있었다. 아마 거기에는 다른 내용도 많이 담겨 있었겠지만, 이 결과를 보고 엄마가 내게 했던 이야기가 워낙 충격적이었던지라 다른 것은 아예 기억에 남지 않았다.


이 시험 등수대로 애들이 쭉 서잖아? 그러면 너는 저어어 멀리 뒤에 서 있는 거야. 너무 뒤에 있어서, 엄마는 너 찾지도 못해.


내가 비록 느려 터진 성격으로 허구한 날 부모님의 성화를 불러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 부모님은 나에게 '공부해라'라는 잔소리는 하지 않으셨다. '공부를 잘한다'는 데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결과만 놓고 보자면 나는 공부를 잘하는 애였으니까.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모든 시험에 거의 만점을 받아오는 아이에게 공부를 닦달할 일은 거의 없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시험 결과지를 받아 들었을 때 엄마는 불안하거나 걱정스러웠던 것 아닐까. 이제 이 아이에게 앞으로 펼쳐질 입시 현실에 대한 감을 심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혹은 얘가 공부를 제법 하기는 할 것 같은데 성향이 워낙 느긋하니 경각심을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건지도. 돌아보면 당시의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어린, 삼십 대 중반의 나이였다. 저 말이 얼마나 성숙한 사고와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을지, 사실 이 나이까지 애를 낳기는커녕 결혼도 안 해본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고작 초등학교 1학년 아니면 2학년이었던 내게 엄마의 저 이야기가 줄 충격의 크기와 그 여파에 대해서는 엄마도 잘 몰랐구나, 하는 건 알겠다.


엄마의 저 말을 듣고, 상상력 부자였던 아이는 곧장 어떤 장면을 머릿속에 그렸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운동장에 수많은 아이들이 한 줄로 서 있었다. 줄은 너무 길어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말한 것처럼 시작점에서부터 저어어 멀리 뒤에, 모르는 아이들 사이에 서 있었다. 줄 앞에는 부모들이 모여 서서 웅성웅성, 자기 아이를 찾고 있었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우리 엄마 아빠를 애타게 찾았다. 까마득히 멀리, 엄마 아빠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너무 멀리 있어서, 엄마 아빠를 외쳐 부르는 목소리는 두 분에게 가 닿지를 않았다. 나는 겁이 덜컥 났다. 운동장에는 모래먼지가 피어올랐고, 햇빛은 계속 내리쬐었고, 나는 지쳐버렸다.


나는 삼십 년 가까이 이 일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굳이 이런 일의 여파가 아니어도 나는 내 개인적인 욕심만으로도 충분한 동력을 얻어 최소한 초중고 12년의 학교 공부만큼은 열심히 하고 잘하며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내가 엄마를 실망시켰고 뭔가 잘못을 했구나' 했던 그 어린 마음이 내 안의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있었고, 성장 과정에 계속 아픈 영향을 줬고, 마흔 살의 첫 중간고사에도 다시 툭, 하고 튀어나온 거였다.


흔히들 하는 말 중에 '너는 엄마의 꿈이고 아빠의 자랑이다'라는 게 있다. 

아이의 자존감을 올려주기 위해 하는 말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한 사람의 평생에 무겁디 무거운 짐을 올려놓는 부담스러운 말이 될 수도 있다. 중학교 때, 허구한 날 50~60점대 시험 점수를 받다가 70점을 받은 후 '부모님이 조던 농구화를 사 줬다'고 자랑하던 친구를 부러워 한 기억이 있다. 시작부터 90점대였던 나는 전과목 만점을 받지 않는 이상 그런 보상을 받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혼자서 절망감에 빠졌던 기억도. 내가 우리 엄마 아빠에게 저런 기쁨을 주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지, 나는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엄마의 꿈과 아빠의 자랑이 되려다 보니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부모님이 골라주는 대로 갔고, 머리가 다 굵어서조차 부모님이 원하는 회사를 선택해 취업하기도 했다. 그 덕에 겉으로 보기에 상당히 괜찮은 '스펙'을 갖출 수 있었지만 나 스스로는 늘 뭔가 충족되지 않는 감정에 불안했다.


말도 안 되는 기도 내용 덕분에 셀프 충격을 받은 첫 중간고사 이후, 나는 결심했다. 

평생을 끌고 온 콤플렉스를 단번에 벗어나기는 어렵겠지만 이제 좀 더 나를 위해 살겠다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을 기쁘게 만들기 위해 공부하겠다고. 

다른 길을 돌고 돌아 꽤나 늦게 찾은 꿈, 내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이전 07화 가라는 가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