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기간엔 딴짓이 최고야
학창시절, 시험기간만 되면 아이들 사이에 도는 병이 몇 가지 있었다. 나는 그걸 '급성 책상정리 증후군'이나 '고 전염성 노트 필기 집착증'이라 부르고 싶다.
평소에 충분히 공부는 해 두지 않았고,
그러니 일단 궁둥이는 붙이고 앉아 봤는데,
오랜만에 책꽂이를 들여다 보니 삼 년 전에 꽂아둔 초등학교 졸업앨범이 눈에 띄고,
어린시절 내 얼굴만 확인하고 닫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잊고 있던 친구들과의 추억이 방울방울 솟아나고,
어느 날에는 옆 친구 공부하는 걸 슬쩍 곁눈질 해 보니 노트 정리가 기똥차게 되어 있는데
내 노트를 들여다보니 개발괴발 날려쓴 글씨가 새삼 거슬리고,
이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노트 정리를 한번쯤 쭉 다시 해야 공부가 될 것 같고,
노트 정리를 제대로 하려면 역시나 펜부터 색깔별로 줄을 세워놔야 할 것 같고.
뭐 이런 일들이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 때마다 벌어져서, 고등학교 시절 나는 시험 기간 즈음해 친구들과 문구점에 몰려가서 당시 유행하는 젤리펜 따위를 오만가지 색깔로 사 모으곤 했다.
놀랍게도, 이런 일들은 마흔의 만학도에게도 벌어지는 것이었다.
일과 학습을 병행하다 보니 바쁘다는 둥 이런저런 핑계로, 강의 영상 시청 말고는 따로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할 시간이 없던 나. 그래도 시험을 일주일 남짓 앞둔 시점에는 시험공부 모드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일주일에 두어 시간씩은 앉아있던 자리였지만, '시험공부를 하자!'라고 마음먹고 의자에 앉으니 느낌이 새로웠다.
왜 이렇게 생경하지?
아무래도 책상 위 물건들의 배열이 이상한 것 같았다. 물건 배치를 반듯하게 다시 하다보니, 구석에 쌓였던 먼지가 보였다. 그래서 청소기와 물티슈를 들고 와 한바탕 청소를 하고 나니 시야가 트였고, 책꽂이 구석에 꽂아둔 일기장이 보였다. 철없던 20대 시절의 낯뜨거운 기록을 뒤져보며 추억여행을 한바탕 할 수밖에 없었다. 일기장을 덮고, 이제는 공부를 시작하려는데 이번에는 온라인 쇼핑몰 앱에서 특가 알림이 왔다. 마침 내가 사려고 눈독들이던 딱 그 브랜드의 딱 그 물건이다. 이건 놓칠 수 없지, 하고 샀다. 이제 정말 공부를 해야 하는데... 온라인 쇼핑몰 앱 옆에 하필 SNS 앱이 설치돼 있다. 코로나 시국에 오랫동안 못 만난 친구들의 안부가 유독 궁금해졌다. 기어이 앱을 열고 남들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다 아차, 하고 시계를 보면 어느 새 자정을 넘어 날짜가 바뀌어 있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중년의 나이에도 공부할 거리를 앞에 두고는 역시나 딴짓이 제일 재미있더라. 게다가 세상은 넓고, 재미있는 것은 너무 많다. 공부의 압박이 커지는 시험기간에는 공부를 제외한 세상 모든 일의 재미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대학원에 들어와 이제껏 세 번의 시험 기간을 지나면서, 나는 평생 처음으로 핸드폰에 게임을 깔았고, 계획에도 없던 유튜브 채널을 열었으며, 읽지도 않을 소설책을 사 모아 온라인 서점의 VIP등급을 획득했다.
누가 마흔을 불혹이라 했던가. 찾아보니 논어에 나오는 말이란다. 그래, 공자님 시대에는 그랬을 수 있겠다. 아직 지학도 이립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한 나는 달라진 시대를 탓하며, 이리저리 유혹에 흔들리는 '이렇게 생겨먹은 나'를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었다. 어차피 딴짓할 거 아는데, 마음이라도 편하게 충분히 딴짓 하고 그 다음에 공부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