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스물넷이야
괜찮아, 스물넷이야
6. 최고의 신뢰는
첫 재임용 시험을 준비했던 반년 내내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 얘기를 아빠도 기억했나 보다. 불합격 결과가 나온 다음 날 아침 일어나보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윤슬아, 방학하면 바다 보러 가자.
일주일 뒤 겨울방학. 중학교 수학여행 이후로 오랜만에 가족들과 찾은 제주도의 바다는 아름다웠다. 오렌지빛 석양이 너른 바닷물에 닿아 반짝이던 윤슬을 잊을 수가 없다. 눈을 감고 모랫바닥에 앉아 한참을 그냥 차가운 바닷바람을 느꼈다. 겨울이라 날카로운 공기에 뺨이 에는 것 같았지만 사실 피부보단 마음이 더 아팠다.
몇 주 뒤 저녁에는 잠시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가고 있는데 아빠와 오빠가 집 앞 호프집에서 나를 불렀다. 찍힌 주소로 찾아가자 내가 좋아하는 고르곤졸라 피자가 한 상 차림으로 가득 펼쳐져 있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고 싶어?”
“내년에 시험 다시 봐야지, 뭐.”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시험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자마자 파블로프의 개처럼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아빠와 오빠가 눈치챌까 봐 아닌 척 피자를 열심히 우물거리느라 혼났다. 사실 방학이 되고 본가에 올라와 지내다 보니 금세 서울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동시에 다가올 3월 새 학기의 개학이 무섭도록 두려웠다. 또, 또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야 한다. 일 년을 버텨야 한다. 어쩌면 평생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시험을 보긴 봐야 하는데.
“또 떨어지면 어떡해?”
결국 나무로 된 식탁 위에 굵은 눈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나는 소매로 눈을 문질러 닦았다. 오빠가 내게 휴지를 건네줬다. 아빠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붙을 거야.”
“아빠가 어떻게 알아. 올해는 떨어졌잖아. 내년엔 안 그럴 거란 보장 있어?”
“너 영어 잘해.”
어이가 없었다. 너 영어 잘하잖아, 도 아니고 잘해, 라니.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못을 박는 말투여서 어이가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빠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어릴 때부터 온갖 영어책을 혼자 가져다가 눈으로 레이저 쏴서 뚫어버릴 기세로 읽어댔다니까. 중학교 들어간 뒤론 학원 한 번 안 보냈는데 수능 때까지 쭉 1등급 받아오고, 초수 때 그렇게 공부를 대충 했는데도 남들은 못 붙어서 난리인 그 임용고시까지 척척 붙고. 안 그래?”
“그래.”
눈물 젖은 눈으로 히죽 웃었다. 맞아, 초수 때 공부를 진짜 대충 하긴 했다. 교생실습을 나갔던 5월은 단 한 페이지도 책을 펼쳐보지 않았고, 교육학은 6월이 되어서야 겨우 개념을 한 바퀴 돌렸으며, 필수로 공부해야 한다는 전공 영어 원서도 딱 한 번씩만 헐레벌떡 읽고 들어갔었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운이었어.”
“그래. 그러니까 이번엔 어떻게 할 거야.”
“열심히 해볼게.”
아빠가 웃었다. 나도 작게나마 해답을 찾았다.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조금씩 마음이 아물고 있었다.
그래, 다시 한번 도전해보자. 10년, 20년 뒤의 나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실패하더라도 후회가 한 톨도 남지 않게.
나에게만큼은 떳떳할 수 있게.
그러니 나는 교사라는 직업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지금도 재임용을 준비했던 그 2년의 시간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 시절의 나에게 떳떳하기 때문이다. 부끄럽지 않을 만큼 노력했고, 정직한 성과의 기쁨을 얻어보았다. 또, 앞으로 살면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얻었다.
"꼭 해낼게."
최고의 신뢰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