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는 집에서 렌터카를 불러 수원 병원까지 타고 다녔다. 말이 렌터카지 버스도 잘 다니지 않던 동네에서 자가용처럼 쓸 수 있는 콜택시였다.
투석을 한번 시작하면 6~8시간이나 걸려서 어찌나 지루하던지 가끔씩 고명딸 태영을 데려가기도 했다.
태영은 읽을 책을 하나 들고 제 아비를 따라가서 투석실 간이의자에 앉아 책도 보고 함께 자장면도 시켜 먹었다. 윤기는 투석하는 날만큼은 원 없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시내로 들어서는 렌터카를 잠깐 세워두고 뛰어가 슈퍼에서 복숭아를 사 왔다. 털이 숭숭한 씻지도 않은 복숭아를 가는 내내 정신없이 베어 물었다. 수박 같은 수분이 많은 과일은 함부로 먹었다가는 숨이 차고 몸상태가 나빠져서 먹을 수가 없는데 투석하러 가면 바로 피를 걸러내니 그때 아니면 그런 호사를 부릴 수가 없었던 게다. 어린 태영은 아빠가 복숭아를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아비의 그런 모습이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8월 15일이 되었다.
"나 오전에 투석 갔다가 오후에 같이 서울 올라가게 당신 준비하고 있어!"
"알았어요"
순자가 소 사료를 주고 분뇨를 치우는 동안 윤기는 병원에 다녀올 준비를 마쳤다. 그러다 마루턱에 앉아 신발을 신고는 마당 너머로 보이는 논을 한참 바라보았다. 어느새 훌쩍 자라 초록 물결이 넘실대는 모습을 보다가 안방에서 늦잠을 자던 태영에게 물었다.
"태영아! 아빠 따라 안 갈래?"
"으으... 나 오늘은 안 갈래... 아빠"
"그래... 더 자거라"
잠결에 대답한 태영이 슬쩍 눈을 뜨니 마루턱에 앉은 윤기의 뒷모습이 보였다. 가만히 앉아 있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대로 잠에 빠졌다.
윤기가 홀로 병원으로 향하고 한참 후 순자와 태영은 집 청소를 하고는 "다했다!"라며 방바닥에 누워 한가로운 한때를 즐기고 있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여기 수원 종합병원인데요. 최윤기 씨 댁 맞나요?"
"네 그런데요"
"최윤기 씨가 투석 마치고 나오시다가 쓰러지셔서 지금 중환자실에 계셔서 연락드렸습니다. 배우자분 되시죠?"
"네? 쓰러지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오시다가 쓰러지셨는데 출입구 근처에 오가는 사람이 없어서 조금 늦게 발견을 했어요. 아무튼 지금 의식이 없으셔서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순자는 전화기를 팽개치듯 내려놓고 태영을 데리고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끼고 있는 윤기를 보자 순자는 다리 힘이 풀렸다. 담당의사가 순자를 찾아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뇌출혈이 왔는데 너무 늦게 발견을 해서 수술할 수가 없었습니다. 의식이 없고 생체반응도 거의 없으신 상태예요. 사실상... 뇌사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호흡기로 간신히 연명만 하고 있는 건데 가족들이랑 상의하셔서 댁으로 모실지 아니면 계속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서 중환자실에 계실지 결정하셔야 합니다."
"........."
순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태영은 의사의 말을 듣는 엄마의 눈을 보았다. 쉴 새 없이 흔들리는 그 눈동자 속에서 불안과 절망을 읽었다.
순자는 콩팥이식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윤기가 저리 됐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놀란 순자가 울면 옆에 태영이 충격을 받을까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진기에게 연락을 했다.
진기가 서둘러 달려와 순자와 상의하는 동안 태영은 진기의 처에 의해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엄마, 울 아빠 괜찮아요?"
"어? 어어... 괜찮아지실 거야... 걱정하지 말고 집에서 기다리자."
집에 가는 내내 태영은 아침에 보았던 아빠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내가 따라갈걸.... 내가 안 가서 그랬나 봐... 나 때문인가 봐... 아빠.. 미안해... 미안해 아빠...'
태영은 자기 탓을 했다. 아침에 아빠가 가자고 할 때 따라서 갔으면 쓰러졌을 때 도움을 요청해서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라는 자책감에 눈물이 났다. 그까짓 잠이 뭐라고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천치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