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의 고백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21화

by 파랑몽상

말보다 먼저 다가온 마음.

그녀도, 그도 모르게… 사랑이 시작되고 있었다.



홋카이도의 7월은 밤이 깊어 갈수록 제 얼굴을 드러냈다.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은 마치 잘게 빻은 다이아몬드처럼 아찔하게 반짝였고,

한여름 끝자락의 밤공기는 서늘하여, 맨살에 닿는 감촉이 얇은 명주 같았다.


수요일, 한국어 교실이 끝난 뒤 나래는 안드레아와 소에다를 이자카야 '쯔보하찌'로 데려갔다.

캐나다에서 온 안드레아에게 영어로 대화할 상대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랏샤이마세!"

미닫이문을 열자 간장 냄새와 술잔 부딪는 소리가 한데 엉겨 들려왔다.

늘 유니폼을 입고 일하던 곳에 손님으로 앉으려니 어색했다.

"나짱! 술도 못 마시는 네가 웬일이야?"

점장이 나래의 어깨를 툭 감싸며 반가워했다.

손끝엔 딸을 대하 듯한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나래가 두 사람을 소개하자, 점장은 엉터리 영어로 인사를 건넸고,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소에다는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나래가 직원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석 달 만에 이곳의 식구가 된 그녀의 모습이 대견하다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자, 내가 일하는 곳이니까 편하게 마셔요!"

나래가 잔을 들어 올렸다.

소에다는 영어로 안드레아와 이야기하면서도 계속 나래를 신경 썼다.

야키토리 꼬치를 발라 그녀 접시에 올려주고, 닭튀김도 건네며 묵묵히 챙겼다.

안드레아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너희, 원래 이렇게 다정해?"

"당연하지! 선생님은 내가 아플 때마다 챙겨주셨거든."

오랜만의 술에 나래의 뺨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해졌고, 소에다는 말없이 찬물을 주문했다.

"그런데 여자친구도 아닌데..."

안드레아가 뒷말을 흐리자, 직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피식 웃었다.

남자가 한 여자를 바라볼 때의 눈빛이 어떤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래는 홋카이도에 온 이후 처음으로 만취했다.


밤길을 걸으며 나래는 비틀거렸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휘청거릴 때마다, 소에다의 팔이 그녀를 받쳐주었다.

"아, 오늘은 조금 많이 취한것 같아.정신이 없네."

나래가 중얼거리자 안드레아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너희, 누가 봐도 사귀는 사이 아니야?"

"아니야!"

나래가 손사래를 치며 외쳤다. 그 순간 몸이 휘청이며 소에다 쪽으로 쏠렸다.

"소에다는 그냥... 진짜 친한 오빠야! 그렇지요, 선생님?"

소에다는 "아... 그래..." 하며 짧게 답했다.

하지만 나래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단단하게 굳은 턱선이 어둠 속에서 또렷했다.

바람이 불어왔다. 나래는 자신도 모르게 더 그에게 기대었다.

소에다는 그 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기숙사 앞. 소에다는 짧게 인사만 남기고 돌아섰다.

"소에다, 화난 것 같던데. 너 일부러 그런 거야?"

안드레아가 물었다.

"안 되는 거야."

나래가 중얼거렸다.

"의사라는 직업은 벽이 너무 높아. 선생님이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유학생을..."


집에 돌아온 나래는 소파에 그대로 쓰러졌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나래, 잠깐 나올 수 있어?]

소에다였다. 나래는 벌떡 일어나다 소파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네. 지금 나갈게요.]

공원 벤치.

소에다는 가로등 불빛 아래에 앉아 있었다. 나래가 다가가 어깨를 콕 찔렀다.

"무슨 일이에요?"

몸을 감싼 취기가 다시 퍼졌다. 소에다가 돌아보았다.

"괜찮아? 얼굴이 새하얘졌는데."

"저 술 마시면 4단 변신해요. 얼굴 빨개지다가, 몸도 빨개지다가, 하얘지고, 마지막엔 떨어요.

근데 왜 부르셨어요?"

소에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래는... 정말 나를 그냥 친한 오빠라고 생각해?"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조용한 물속처럼 깊었다.

나래는 고개를 들어 소에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여름밤의 별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 작가의 말

오늘 이 장면을 쓰면서, 소에다 선생님을 떠올리다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사실에 가까운, 그러나 분명히 허구인 소설을 쓰면서…

어쩌면 저만의 사심을 채우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실은, 소에다는 진짜 도쿄에서 오신 의사 선생님이셨습니다.
제가 홋카이도를 떠날 때도, 10년 전 소식을 들었을 때도... 아직 혼자이셨죠.

지금은… 짝을 찾으셨을까요.
가끔, 불쑥 생각납니다. 그리고 괜히 궁금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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