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23
후카가와 여름밤, 불꽃놀이 속에서 나래는 아직 말하지 못한 감정과 마주한다. 설렘과 망설임의 교차점.
아침 일찍 울린 초인종 소리에 나래는 부스스 일어났다.
노란색 암막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눈을 찔렀다.
"나래! 아직도 자고 있는 거야? 역시 술이 약하구나."
문을 열자마자 안드레아가 잔소리를 하면서 능숙한 손놀림으로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나래는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어제 저녁에 소에다랑 둘이 만나는 거 봤어.둘이 무슨 이야기 나눴는지 너무 궁금해서 이렇게 아침 일찍 왔다고."
안드레아는 마치 제 집인 양 부엌으로 들어가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달콤한 복숭아 향과 은은한 살구 향이 집 안을 채우자, 나래의 잠이 완전히 깨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저녁에 늦게까지 얘기했더니 오늘은 정말 피곤해."
나래는 커다랗게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떤 얘기를 했길래 둘 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었어?"
안드레아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나래를 향했다. 나래는 커피잔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으며 망설였다.
"소에다 선생님이... 나랑 사귀고 싶다고 하셨어. 그런데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안드레아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너 소에다를 좋아하잖아. 네가 그 사람을 바라볼 때마다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정말? 나는 그냥 존경하는 마음으로..."
안드레아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나래, 너 자신의 마음을 좀 더 솔직하게 들여다봐. 소에다는 좋은 남자야. 그리고 내가 봤을 때, 너희 둘은 서로에게 잘 어울려."
나래는 잠시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았다.
소에다가 환하게 웃을 때마다 가슴에 번져오는 따스함, 그가 곁에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묘한 안정감, 그리고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를 때마다 불규칙해지는 심장의 리듬.
이 모든 것들이 단순히 친근함에서 오는 감정일까? 아니면...
안드레아가 나래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가슴이 이미 답을 알고 있는데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는구나. 이 답답한 아가씨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늦기 전에 준비하고 학교 가. 그리고 나래, 때로는 용기도 필요해."
안드레아가 문을 닫고 나간 후에도 그녀의 말은 공기 중에 맴돌았다.
나래는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후, 오오쿠미 씨가 환한 표정으로 나래를 불러 세웠다.
"나래야, 이번 주 수요일에 불꽃놀이 축제가 열리는 거 알고 있어?"
"불꽃놀이요? 여기 후카가와에서요?"
나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오쿠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매년 7월 말에 후카가와 시에서 여는 큰 축제야. 이시카리 강에서 하는데, 정말 장관이지. 누구랑 같이 갈 거야?"
"음... 옆집 안드레아랑 같이 가면 될 것 같아요. 분명 엄청 좋아할 거예요."
나래는 태어나서 처음 보게 될 불꽃놀이를 떠올리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혹시 유카타는 있어? 불꽃놀이에는 유카타 입고 가거든."
"유카타요?"
나래는 당황했다. 일본 전통 여름옷인 유카타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걱정 마. 내가 입지 않는 유카타 몇 벌 있으니까 가져다줄게. 네가 좋아할 만한 걸로."
오오쿠미의 배려에 나래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날 밤, 나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소에다 선생님도 불꽃놀이에 가실까? 혹시 문자를 보내볼까? 아니면 너무 부담스러울까?'
예전 같았으면 자연스럽게 안부라도 물어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간단한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것도 이토록 복잡하게 느껴졌다. 마음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말은 더욱 조심스러워지는 법이었다.
불꽃놀이 당일.
가이드북에서 읽었던 문장이 문득 떠올랐다.
'홋카이도의 여름은 짧지만, 그 아름다움은 오래도록 기억된다.'
7월의 끝자락, 후카가와에 스며든 바람이 어느새 가을의 전령을 품고 있었다.
한낮의 뜨거운 햇살도 예전보다 일찍 수그러들고, 코끝에 닿는 공기에서 계절의 변화가 느껴졌다.
나래는 오오쿠미가 건넨 유카타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어색했지만, 유카타 차림의 자신은 확실히 일본 여름 축제의 한 장면 같았다.
안드레아는 연하늘색 유카타를 입고 이리저리 돌아보며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해질 무렵, 두 사람은 이시카리 강을 향해 걸었다.
유카타 자락이 저녁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오후 6시 30분, 축제가 열리는 강가에 도착했을 때 나래는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소에다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이시카리 강.
아이누어로 '구부러진 강'이라는 뜻의 홋카이도 대표 하천이다.
평소엔 고요하기만 했던 강변이 오늘만큼은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축제 음식의 고소한 냄새로 가득했다.
일 년 중 후카가와가 가장 활기를 띠는 밤이었다.
"와, 닭꼬치! 그리고 생맥주도 있네! 나래! 저기 닭튀김, 야키소바, 타코야키도 있어 "
안드레아의 파란 눈이 반짝였다.
축제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생맥주를 두 잔 마신 그녀의 볼은 불꽃놀이보다 먼저 붉게 물들어갔다.
"소에다한테 연락 안 했어?"
안드레아의 물음에 나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용기가 안 나더라."
"아이고, 그럼 소에다는 네가 거절한 걸로 생각하는 거 아냐? 그러다가 다른 누군가한테 마음 빼앗기면 그때 후회할 거야?"
안드레아는 닭꼬치를 한 입 베어 물며 혀를 찼다.
나래는 무의식 중에 유카타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닿았던 그 순간들이 떠올랐다.
해가 완전히 산 너머로 사라지자 장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불꽃놀이가 시작됩니다."
나래와 안드레아는 돗자리에 나란히 앉아 무릎 위에 얇은 담요를 올렸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품고 있는 설렘이 강바람을 타고 흘렀다.
"첫 번째 불꽃은 후카가와 꽃마을에서 협찬해 주신..."
쾅!
첫 불꽃이 어둠을 찢으며 하늘로 치솟았다.
밤하늘에 거대한 국화 한 송이가 피어났다가 금가루처럼 흩어져 내렸다.
이어지는 불꽃들이 밤하늘과 강과 산을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 삼아 색색의 빛으로 수놓아졌다.
"세상에... 이건 정말 꿈같아!"
안드레아가 감탄사를 연발하다 끝내 돗자리에 등을 대고 드러누웠다.
나래도 따라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밀려왔다.
시원한 바람도, 화려한 불꽃도, 가슴 한편에서 요동치는 설렘도, 모든 것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래, 이런 거 처음 봐. 이걸 공짜로 볼 수 있다니, 너랑 함께여서 더 특별해!"
안드레아가 두 팔을 하늘로 벌리자 나래는 웃으며 그녀를 포근히 안았다.
하지만 웃고 있는 나래의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공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일수록 마음 깊숙한 어둠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법이었다.
그때였다.
"나래야!"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나래의 심장이 뛰었다.
돌아보니 연분홍 유카타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미나코가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 봐도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그녀가 오늘은 특히 눈부시게 느껴졌다.
"미나코! 여기서 만나다니..."
"소에다 선생님이랑 같이 왔어. 혹시 연락 못 받았어?"
미나코의 말에 나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 뒤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소에다가 서 있었다.
진한 남색 진베이를 말끔히 차려입고 접힌 부채를 한 손에 든 채, 불꽃처럼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나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 나래의 심장이 하늘의 불꽃소리에 묻혀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후카가와시는 7월 말마다 불꽃놀이 축제가 열립니다.
8년 전, 제가 여행으로 후카가와를 찾았을 때도 운 좋게 이 축제를 볼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두 아이의 엄마가 아니었고,
그저 밤하늘만 바라봐도 설렘이 가득하던 20대의 저였죠.
지금은 아이들 챙기느라 하늘을 오롯이 바라볼 여유조차 없지만,
이 장면을 쓰는 동안만큼은
순수하게 불꽃을 올려다보던 그 시절의 저를 다시 만날 수 있었어요.
글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가장 먼저 선물하게 되는 건,
어쩌면 이렇게 잊고 지낸 마음의 조각들 인지도 모르겠어요.
오늘도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