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24
진한 화약 냄새는 축제가 끝난 허무함처럼 아스팔트에 스며들었다.
밤공기는 무거웠고, 나래의 마음은 그보다 더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안드레아가 조용히 나래의 손을 잡았다. 말없는 위로였다.
나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지만 곧바로 입꼬리가 내려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나래의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소에다도 나래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걸었다.
평소 같았으면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으로 가서 함께 걸었을 텐데,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어깨가 말하고 있었다. 거리를 두라고.
나래는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소에다 옆에 미나코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다정하게 나란히 걷고 있다는 것을.
어둑하게 내려앉은 조명 아래 묵직한 원목 테이블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자리했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위스키 병들은 마치 오래된 도서관의 책처럼 세월의 무게를 품고 있었다.
재즈 선율이 공기 중에 스며들어 있고, 바텐더는 말보다 눈빛으로 대화했다.
브라질에서 온 여성은 이곳 바의 직원이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손님들 사이를 오가며 분위기를 달궜다.
때로는 말없이 잔을 채워주며, 이 작은 공간의 온도를 조절하는 사람이었다.
네 사람이 앉은 테이블은 완벽한 사각형이었다.
나래와 소에다가 대각선으로 마주 앉고, 미나코는 소에다 옆자리를 차지했다.
"나래, 유카타가 정말 잘 어울려."
미나코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벨벳 같았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미나코짱은 정말... 어떻게 매번 이렇게 아름다우세요?"
진심이었다. 미나코의 아름다움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도자기 인형처럼 하얀 피부에 우아한 말투와 손짓, 34세라는 나이가 무색한 청순함까지.
나래에게 그런 그녀는 부러움의 대상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래는 오늘 어떻게...?"
소에다가 무심한 듯 나래에게 질문을 던졌다.
"같은 과 언니가 알려줬어요. 태어나서 처음 본 불꽃놀이였는데... 생각보다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나래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신중하게 골라서 대답했다.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소에다의 말에 공기의 무게가 미묘하게 변했다.
"저와 함께 봐서 좋지 않았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미나코가 웃으며 말했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안엔 미묘한 가시가 숨어 있었다.
소에다는 안절부절 못하며 손사래를 치고는, 말없이 술을 한 잔 들이켰다.
안드레아가 가라앉은 공기를 띄우기 위해 끼어들었다.
"건배할까요? 이렇게 모인 것도 처음인 것 같은데."
서로 다른 색의 술이 담긴 네 개의 잔이 만났다.
그 잔 속에는 각기 다른 마음이 담겨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술잔은 비어갔고, 마음의 문은 점점 열렸다.
나래의 뺨은 술한잔에 붉은빛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들이 목구멍까지 올라오기 시작했다.
"선생님."
나래가 소에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평소 볼 수 없었던 강인함이 있었다.
"정말 이해가 안 가요."
테이블 위로 정적이 흘렀다.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해놓고..."
나래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또렷했다.
"왜 오늘 같이 가자고 저한테 연락 한 번 주지 않으셨어요? 저 은근히 기다렸는데..."
미나코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나래... 사실은..."
소에다가 말을 시작하자 미나코가 나섰다.
"몰랐구나? 오늘 소에다 선생님은 삿포로에서 학회가 있었는데 일정이 갑자기 취소되어서 오게 된 거야.
아마 취소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삿포로에 계셨을 걸?"
소에다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쥔 위스키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아... 그러셨구나. 그런데 왜 일주일 내내 연락 한 번 주시지 않았어요?"
나래는 술에 힘을 빌려 말을 이어갔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 꺼내지 못했을 말들이, 지금은 너무나도 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에다가 입을 열려 하자, 나래가 다시 말했다.
"지금은 말하지 마세요!"
그녀는 연거푸 잔을 비웠다.
잔이 책상 위에 ‘툭’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공기를 가르렀다.
"나래... 이미 많이 마신 것 같은데…"
미나코는 그 말투와 눈빛에 당황한 듯, 술잔을 쥔 나래의 손을 조심스레 감쌌다.
"그래.. 나래. 오늘은 그만 마시고 집에 가자"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술은 점점 나래의 온몸을 휘저어놓고 있었다.
"나래..."
소에다가 다가오려 했지만 나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안 돼요. 저 지금 너무 솔직해져 있어서 선생님한테 무슨 말을 할지 몰라요."
미나코와 안드레아는 멀찍이 서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나코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함께 안타까움,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안드레아가 달려가 나래의 팔을 살짝 잡았다.
"집으로 가자."
나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역시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소에다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처음으로 나래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다가가 나래를 부축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곁에는 안드레아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단호하게 자신의 손길을 거절할 것을 알기 때문에 다가갈 수 없었다.
나래는 서운한 마음을 안드레아에게 털어놓았다.
"나를 좋아한다고 해놓고서 이래도 되는 거야? 응? 안 되는 거잖아. 내가 이상한 거야?"
안드레아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에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신 차려 나래! 그리고 나한테는 영어로만 말해. 영어!"
하지만 나래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저 어젯밤에만 해도 아름다웠던 밤하늘의 별들이 오늘 밤은 이상하게 자신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춤추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소에다는 마뜩잖게 멀어지는 나래와 안드레아를 바라보았다.
미나코는 그런 소에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괜히 제가 따라왔나 봐요. 나래한테 오해만 쌓이게 한 것 같아서 죄송해요."
미나코의 목소리에 소에다는 그제야 나래에게서 눈을 뗄 수 있었다.
"아닙니다. 오해는 제가 내일 풀면 됩니다. 오늘 같이 오자고 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소에다는 미나코로부터 멀어져 갔다.
미나코는 서운했다.
3년간 짝사랑했던 남자는 한 달 만에 한국 유학생에게 마음을 빼앗겨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어리고 외국인이라서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그녀만의 바람이었나 보다.
집으로 가는 방향도, 집도 같은 센트럴 하우스인데... 그녀만 남겨두고 성큼성큼 멀어져 가는 그를 바라보는 미나코의 마음에는 서운함보다는 원망과 미움이 가득했다.
미나코는 멀어져 가는 소에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도저히 그녀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더운 여름이 어느덧 끝자락에 다다랐습니다.
입추가 지나고, 내일이면 말복이네요.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를 쓰며
다시금 유학 시절의 저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여름, 그때의 감정들,
그 모든 것이 다시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듯
글을 쓰는 제 얼굴에도 어느새 미소가 번지고 있답니다.
여러분은 이 여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무더운 날들 속에서도,
마음 어딘가엔 시원한 바람 하나쯤은 스치고 지나갔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