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가갈게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26

by 파랑몽상

술이 깨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사랑도 그런 것 중 하나였다.


“선생님이 온 것 같았는데?”

나래는 순간 번쩍 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고, 머리야! 숙취가 아직도 남아 있네.”

나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머리 양쪽 관자놀이를 열심히 문질렀다.

“분명 선생님이 오신 것 같았는데… 꿈이었나?”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침대 곁에는 뚜껑이 살짝 열린 죽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야무지게 먹은 숙취 해소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가기 전에 깨워주지… 왜 아무 말도 없이.
나래의 속삭임은 허공에 흩어졌다.

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 3시가 넘었다.

나래는 아르바이트에 가지 못할까 걱정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일을 할 수 있을 만큼은 회복된 상태였다.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소에다의 모습을 찾았지만, 역시 없었다.

나래는 결국 소에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도 못 한 채,
또 흉한 꼴만 보이고 만 것이다.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워 머리를 주먹으로 툭툭 때렸다.

“이나래! 너는 도대체 왜 이 모양이니! 어이구!”

정말이지, 자신이 한심했다.


술이 깨기 시작하니 허기가 졌다.

그리고 소에다가 차려주고 간 죽을 보자, 자동으로 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감기에 걸렸을 때처럼, 소에다는 조용히 그녀의 곁을 지키다 말없이 자리를 비운 것이다.

'가기 전에 좀 깨우고 가지... 왜 아무 말도 없이…'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속삭임은 허공으로 사라졌다.

어젯밤의 기억을 붙잡으려 했지만, 머릿속은 흐릿했고 천장이 느리게 회전하는 듯한 감각은 여전했다.

몸은 땀구멍이 전부 열린 것처럼,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속이 텁텁하고, 입 안은 바싹 마른 채였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고, 어느새 아르바이트에 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나래는 겨우 몸을 일으켜 옷을 걸쳐 입고, 문을 나섰다.
아직도 온몸에 알코올 냄새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자전거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그나마 조금씩 정신이 드는 듯했다.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소에다에 대한 생각도 점점 짙어져 갔다.

홋카이도로 유학 온 이래, 나래를 가족처럼 지켜준 사람 중 한 명이 소에다였다.
세상 누구보다 자신만을 바라봐 주고, 사소한 것까지 챙겨주며, 나래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래도 처음에는 이런 호의가, 단지 자신이 외국인이라서 나이가 어려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에다는, 나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녀에게 진심이었다.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면서 나래는 연신 한숨만 쉬었다.


지독한 피로와 숙취는 나래의 몸을 한없이 괴롭게 했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반복되는 일상은 잔잔한 물결처럼 요동치는 그녀의 감정을 천천히 씻어내고 있었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아르바이트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 동안만큼은 소에다 생각을 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밤 11시, 아르바이트를 마친 나래는 탈진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가게 문을 나서는 순간, 늦여름의 서늘한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자전거 바퀴가 부드럽게 물결을 가르듯 지나갔다.


제2 센트럴 하우스의 현관문을 열자, 바로 맞은편 문이 활짝 열렸다.

"나래~ 힘들었지? 어서 와!"

안드레아가 두 팔을 벌려 나래를 안아주었다.

장난기 가득한 안드레아는 나래를 숨도 쉬지 못하게 꼭 껴안았다.

그 순간, 나래는 왈칵 눈물이 터졌다.

그 품에서 따뜻함을 느꼈는지, 아니면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래? 왜 울어? 무슨 일 있었어?"

안드레아는 온갖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노! 그런 것 아냐. 아무 일 없었어. 오늘 소에다가 와서 나를 간병해 준 것이 갑자기 생각하면서 엄마가 보고 싶었어."

안드레아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나래의 등을 얼러 만져줬다.

방에 들어온 안드레아는 자연스럽게 나래의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어차피 나래는 마시지 않으니까 내가 마실게."

맥주 캔이 열리는 소리만 들어도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 같았다.

"윽! 안드레아 안 되겠어. 술냄새만 맡아도 나 토할 것 같아."

나래의 표정을 보자 안드레아는 뒤돌아서 얼른 한 모금 마셨다.

"그럼 나래! 솔직한 너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너 어제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거야?"

나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질투가 났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불꽃놀이 날… 선생님이 미나코랑 같이 왔잖아. 미나코의 핑크색 유카타. 둘이 서 있는데 너무나 잘 어울렸어. 그 순간, 숨이 턱 막혔고…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어."

안드레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전에 선생님이 나한테 사귀자고 고백했다고 말했지?
한편으론, 미나코가 선생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너무 잘 알아.
내가 홋카이도에 온 뒤로, 미나코랑 선생님 사이가 조금 멀어진 것 같아서… 그게 내내 미안했어.”

나래는 완벽하지 않은 영어로, 더듬더듬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전하려 했다.
손짓과 표정 같은 바디 랭귀지를 섞어 가며, 안드레아에게 마음을 쏟아냈다.

“미나코는 선생님을 5년 동안 좋아했다고 했어.
그냥…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둘 사이를 어색하게 만든 건 아닐까 싶어.
내가 없었으면, 둘은 지금쯤 연인이 되어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나래는 애써 웃었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는 여전히 흔들림이 가득했다.

그러자 안드레아가 나래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나래, 넌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잖아. 너, 그것도 병이야.

너를 챙겨. 사람은 가끔은 이기적이어야 한다고. 아마 소에다는… 그런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귀여우면서도 이렇게 상냥하고 친절하니까."


안드레아의 말에 나래는 큰 위로를 받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늘, 나래는 자신의 감정을 뒷전으로 밀어두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먼저 챙기고, 자신이 상처받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선생님이 너무 잘해주니까… 점점 마음이 끌려.
이런 감정이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내가 전에 얘기한 적 있지?
한국에 짝사랑하는 선배가 있다고.

그런데 내가 이렇게 선생님한테 끌릴 줄이야.
안드레아, 어쩌면 좋지?

미나코한테 뭐라고 말하면 될까?
나, 선생님이랑 사귀어도 되는 걸까?

그럼 미나코랑 계속 친구 할 수 있을까?”

안드레아는 그런 나래가 귀여워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래! 내 생각에 소에다는 순수하고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소에다의 눈에 네가 들어온 게 아닐까?

둘이 아직까지 자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야. 눈빛만 보면 둘이 엄청 끈적거리던데 생각보다 순수하네, 소에다랑 나래~!"

농담 섞인 말에 나래는 얼굴이 붉어졌다.

안드레아와의 대화 후, 비로소 나래는 자신의 정확한 감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래의 얼굴에도 배시시 미소가 번졌다.


여름의 청량한 바람에 커튼이 살랑거렸다.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안드레아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혼자 남은 방 안, 나래는 이불을 당겨 얼굴을 묻으며 생각했다.

소에다의 행동 하나하나는 모든 게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의 고백이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는 걸,

나래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결심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소에다에게 먼저 다가가기로 말이다.


베란다에 심어둔 페튜니아의 보랏빛 꽃이, 달빛 아래에서 고요하게 피어 있었다.

여름밤이 깊어갈수록, 소에다를 향한 나래의 마음도 더욱 짙어졌다.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브런치 26화 이미지.png

작가의 말:

시간이 지날수록, 회차가 늘어날수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쓰는 게 맞나? 이 이야기가 정말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까?
그만두어야 하나?’

글을 쓸수록 오히려 불안감은 커지고, 마음은 자꾸 흔들립니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다른 작가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이 불안을 이겨내며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가고 계신가요?

- 파랑몽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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