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27화
파운더를 입힌 듯한 청량한 바람이 창문으로 스며들었다.
선풍기조차 필요 없는, 홋카이도 후카가와의 7월을 나래는 태어나서 처음 맞이하고 있다.
바람이 탁자 위 프린트를 흔들더니, 단어장 사이에 숨겨둔 메모지를 바닥에 내려앉혔다.
'죽, 식기 전에 먹었으면 좋겠다...'
만년필 잉크의 결이 선명했다.
그 한 줄에서 소에다의 온기가 느껴졌다.
책상 위엔 시험 범위가 적힌 종이들이 흩어져 있었고, 달력엔 '기말고사'가 빨간 펜으로 표시돼 있었다.
여름방학까지 남은 건 일주일.
마음은 여전히 그 사람 쪽으로 흘렀지만, 손끝은 묵묵히 한자를 적어 내려갔다.
기말고사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시험이 끝나면 홋카이도 각지는 물론 도쿄, 아오모리, 교토에서 온 학생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래는 곧 비워질 교정을 상상하며, 홀로 후카가와에 남을 자신을 떠올렸다.
돌아갈 항공료를 아끼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곳의 공기와 계절을 더 오래 느끼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나래는 일상대화에서 일본어로 말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시험지 위의 전문 용어나 한자들은 여전히 낯설었다.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해서 외워도 다시 외우려고 하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단어들이 있었다.
그럴 때면 나래는 사전을 펴 들고 다시 하나씩 찾아야 했다.
같은 과 친구들도 그녀의 공부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나래가 어려워하는 공부는 과외도 해주고, 그녀는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수첩에 꼼꼼하게 적어 두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친 늦은 밤, 스탠드 불빛 아래 앉아 리포트를 정리하고 프린트를 외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 부모님과, 그리고 자신과의.
이런 나래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응원해 주었다.
교수님은 시험 때 일본어 사전 사용을 허락했다.
사회인 입학생들은 나래가 쌀이 떨어졌다고 하면 직접 농사지은 쌀을 가져다주었다.
토마토, 아스파라거스, 감자, 옥수수까지. 흙이 묻고 울퉁불퉁하거나, 갈라져 모양은 제각각이었지만
맛은 어느 상품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았다.
홋카이도의 태양과 바람, 공기를 마시고 자란 덕분일 것이다.
이곳에는 자연이 있고, 맨발로 흙을 밟을 수 있고, 이웃의 안부를 묻는 목소리가 있다.
학교 농장에 가면 살이 통 실하게 오른 토마토가 붉게 익어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따서 먹을 수 있었다.
나래는 예순이 되면 이곳에 작은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띠링-
점심을 먹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마사였다.
"공부 힘들지?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마사는 여전히 좋은 동생이었다.
그의 고백 이후 어색해질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더 편해졌다. 나래는 짧게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 너도 시험 잘 봐. 내가 공부 더 잘하는 거 알지? 모르는 건 누나한테 물어봐."
곧 화면에 웃음 마크 하나가 떠올랐다.
저녁 무렵, 또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소에다였다.
"나래, 시험 준비 잘 되어가? 무리하지 말고. 몸 조심해."
나래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 메모 속 글씨를 떠올렸다.
'죽, 식기 전에 먹었으면 좋겠다...'
마음을 어떻게 답장에 담을 수 있을까.....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우리 곧 만나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서도,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창문 너머로 다시 시원한 바람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장마 없는 홋카이도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멀리까지 트여 있었다.
나래는 책장을 넘기며 생각했다.
계절도, 사람도, 감정도 모두 지나간다는 것을.
10월 중순이면 홋카이도는 겨울을 준비할 것이다.
4월 입학식 날,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걸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물기 없이 바싹 마른 눈송이들이 바람에 흩어지던 모습까지.
귀뚜라미의 메마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특급열차가 스쳐 지나가는 소리도 함께 했다.
여름은 절정을 넘고, 저물어가고 있었다.
나래는 연필을 놓고 기지개를 켜며 잠시 귀를 기울였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시험도, 계절도, 그리고... 사랑도.
한자 연습장 위에 떨어진 소에다의 메모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저녁 햇살이 글씨 위에 길게 내려앉았다.
작가의 말: 제가 타쿠쇼쿠 대학 홋카이도 단기대학에서 지내던 시간 동안, 정말 많은 분들께 도움을 받았습니다.
소설 속에 쓴 것처럼 쌀이며 채소, 크리스마스와 추석, 설날까지… 단 한 번도 혼자 보낸 적이 없을 정도로 언제나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2년이라는 시간을 사랑받으며, 또 많은 것을 배우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 시절을 소설로 풀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제겐 큰 행복입니다.
저는 여러모로 참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의 하루에도, 그런 따뜻한 온기가 함께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