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전화, 흔들린 마음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28화

by 파랑몽상

때로는 한 통의 전화가 잠들어 있던 감정을 깨운다.


새벽 전화


새벽 한 시. 철길 위 특급열차 소리가 멈췄다.

달빛만이 나래의 방을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책상 위엔 내일 기말고사 준비물들이 펼쳐져 있었지만,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제 자야지."

나래는 기지개를 켜며 책을 덮었다. 시험이 끝나면 소에다에게...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따르릉-

휴대폰이 울렸다. 국제전화였다. 이 시간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여보세요?"

"야, 나래야? 나 준철이야."

심장이 멈췄다.

"..."

"듣고 있어? 나 기억하지?"

"응... 듣고 있어."

목소리가 떨렸다. 나래는 베란다로 나갔다. 달이 구름 뒤로 숨어버렸다.

"아버지가 네 번호 알려주시더라. 서운한데? 나한테 연락도 안 하고 일본으로 가버리고."

술 냄새가 전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오빠, 술 마시고 있어?"

"응. 동창들이랑 신촌에서 마시고 있어. 술 마시는데 갑자기 네 생각이 나더라고."

나래는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너 나 좋아한다고 해놓고 그렇게 가버리면 어떻게 하냐? 나 심심하거든."

능청스러운 웃음소리.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아팠다.

나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화가 났다. 동시에 그리웠다. 이 복잡한 감정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술이 취하니깐 딱 네가 생각나더라고! 어?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미연아 금방 갈게!"

'미연이.' 그는 또 그사이에 새 여자친구가 생긴 모양이었다.

"미안, 여자친구가 불러서. 다음에 또 전화할게.... 질지 내라"

뚝.

나래는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베란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끌어안으니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밀려오는 기억들

검도복 입은 준철이 떠올랐다. 박태희 교수님의 둘째 아들.

체육관에서 처음 본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1학년 때 검도부에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박교수 님은 성실한 나래를 예뻐하셨다.

"내 아들이 너 같은 애를 만났으면 좋을 텐데."

그 말 한마디에 얼마나 설렜던가.
하지만 준철은 언제나 다른 여자들과 함께였다.

나래의 마음을 알면서도, 아버지의 바람을 알면서도,
언제나 나래를 스페어타이어처럼 옆에만 두었다.

항상 절묘한 거리를 두었다.

희망을 주다가 벽을 쌓고, 다가서다가 멀어지고. 그 반복에 지쳐 일본까지 왔던 게 아니었던가?

"심심하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흔들렸다.

'그래도... 나를 생각해서 전화했다는 게.'

한심한 나란 여자......


두 개의 온기


저 멀리 소에다의 집이 보였다.

며칠 전 죽 한 그릇의 온기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따뜻함.

준철과는 다른 온도였다.

'내가 뭘 원하는 걸까?'

시험이 끝나면 소에다에게 마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준철의 전화 한 통이 모든 걸 흔들어버렸다.

새벽 공기가 차갑게 스며들었다. 하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한 통의 전화가 이렇게 많은 것을 바꿔놓다니.

구름 뒤로 숨은 달처럼, 나래의 마음도 보이지 않았다.




작가의 말
온전한 허구만으로 세상을 그려내는 작가들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 서툴러서인지, 제 첫 소설 속에는 늘 저의 경험이 조금씩 스며듭니다.

첫사랑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겠지요.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의 첫사랑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요?

오늘 밤은 괜스레 그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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