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위로 번진 따뜻한 커피 향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29

by 파랑몽상

새벽의 불안, 시험의 긴장, 그리고 소에다의 메시지. 나래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림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흔들린 새벽의 끝

알람이 울렸다. 아침 7시.

새벽 2시까지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던 몸이 납덩이처럼 무겁다.

거울 앞에 선 나래는 퉁퉁 부은 눈꺼풀을 보며 한숨을 토해냈다.

"준철 오빠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 마음 갖고 노는 건 똑같네."

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에게 혀를 찼다. 그런 불장난에 또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이 한심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 사람은 여전히 나를 가지고 장난치고 싶은 것뿐이었다.

귓가에 맴도는 새벽 전화의 목소리.

'네가 없으니까 심심하다'라고 술에 취해 던진 그 한마디가 아직도 가슴에 못처럼 박혀 있었다.


커피 향에 깃든 따뜻함

핸드폰의 진동음이 들렸다.

나래는 소에다이길 바라며 핸드폰 화면을 열었다.

역시 그였다.

'어제 늦게까지 공부했지? 현관에 커피 걸어두었어.커피 마시고 힘내! 나래는 잘할 수 있어. 보고 싶어.'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현관으로 달려갔다.

쇼핑백 안에는 검은색 텀블러 두 개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소에다는 벌써 출근한 뒤였다. 몰래 가져다 놓고 간 것이었다.

뚜껑을 열자 진한 커피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직접 내린 커피였다.

한 모금 머금으니 쌉쌀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커피 한 잔이 나래를 몽롱한 기분에서 구해주었다.

준철의 무책임한 말들로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따뜻한 메시지 한 줄과 정성스러운 커피 한 잔에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는 길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아직 외우지 못한 단어들을 중얼거렸다.

초여름 바람이 볼을 스치며 긴장감을 달래주었다.

나래는 습관처럼 농수로 앞에서 멈춰 섰다.

투명한 물이 졸졸 흘러가며 햇빛에 부서져 반짝였다. 작은 물고기들이 은빛 꼬리를 흔들며 스쳐 지나갔다.

철컥―

멀리서 라일락 특급이 굉음을 내며 달려왔다.

유리창이 여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래의 시선이 본능처럼 기차 꽁무니를 따라갔다.

바람이 한 번 크게 불어가고, 다시 물소리만 남았다.



시험지 위의 마음

교실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이런 분위기는 시험 기간에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것이었다.

1번인 나래는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어제 밤늦게까지 외우려 애썼던 한자와 공식들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그런데 '네가 없으니까 내가 심심하잖아?'라는 새벽 전화의 그 말이 또다시 머릿속을 스쳤다. '그럼 나는 심심할 때나 찾는 사람이란 말인가? 치!'

시험 벨이 울리고 조교가 문제지를 나누어주었다. 나래는 펜을 잡았지만 글씨가 잘 써지지 않았다.

'안 돼, 정신 차려.'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천천히 숨을 고르고 심호흡을 하고 문제를 다시 바라보았다.

어제 외웠던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생산비 계산 문제도 과 친구들이 알려준 대로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생각보다 문제가 잘 풀려나가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래는 또 하나의 고비를 넘긴 듯한 기분이었다.



잔디밭에서 듣는 진실

시험이 끝나자 약속이라도 한 듯 삼삼오오 학교 뒤에 있는 잔디밭으로 모였다.

사회인 코스로 들어온 과 친구들은 다들 시험 첫날이 끝난 후련함과 아쉬움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잔디밭 너머로 솜털 같은 몽글몽글한 구름이 두둥실 느긋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갑자기 생산비 계산 공식이 생각이 안 나더라. 쉰 넘으니까 머리가 굳어서 큰일이야."

단 씨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나도 반은 찍었어."

"분명히 외웠는데 왜 시험지 앞에서는 생각이 나지 않는 걸까? 역시 공부도 때가 있다는 말이 맞나 봐."

다들 시험 첫날의 감상과 유쾌한 대화를 나누었다.

나래는 문득 어제 준철의 말이 다시 떠올라서 과 친구들에게 의견을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한국에서 짝사랑하던 남자가 있었는데, 늘 저를 희망 고문하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제 술에 취해서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서는 '네가 생각났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순간 공기가 조용해졌다가 여기저기서 반응이 쏟아졌다.

"어머, 나쁜 남자네!"

"그런 사람 조심해야 해."

"심심해서 그런 거지 뭐. 완전 이기적이야."

"그런 사람은 상대하지도 마! 안 돼. 나래만 더 힘들어져. 그런 남자는 절대 다시 만날 생각하지 마."

나카무라 씨가 갑자기 큰 한숨을 쉬더니 단숨에 말을 이어갔다.

"나짱, 그건 그냥 그 남자의 습관이자 버릇인 거 아냐? 의미 두지 마! 진짜 나짱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술 취해서 그런 말 하지 않아. 그리고 나짱이 좋아하는 거 알면서 여자 친구 이름도 불렀다면서? 그런 연락받고 흔들렸다는 나짱이 자존감 없어 보이는데?"

나래는 정곡을 찔린 듯 가슴이 뜨끔했다.

그 말이 그대로 가슴과 머리에 스며들면서 마음속 안개를 조금씩 걷어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심스러운 첫 번째 다가감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집으로 걸어왔다.

아침과는 다르게 뜨거운 태양이 머리 위에서 위세를 뽐내고 있었다.

기숙사 앞 작은 공원의 나무 벤치에 앉았다.

오후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들어 얼룩진 그림자를 만들고, 멀리서 병원 일을 마친 간호사들이 하얀 신발을 끌며 기숙사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래는 무의식적으로 주머니 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오래 망설이다 메시지를 적었다.

'선생님, 잘 지내시죠? 아침에 커피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시험은 생각보다 잘 봤어요. 혹시 이번 주 수요일 한국어 교실 끝나고 같이 밥 먹을 수 있을까요?'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하게 적어나갔다.

보내기 버튼 앞에서 손가락이 한참 머뭇거렸다.

처음으로 먼저 소에다에게 다가가는 것이 나래에게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전송 버튼을 누르고 다리를 동동 굴렀다.

그리고 그로부터 답장이 왔다.

'나래야, 고생했어. 수요일 한국어 교실 끝나고 후카가와 언덕 성당 근처 작은 레스토랑에 예약해 놨어. 네가 좋아할 만한 곳이야.'

준철의 전화 때문에 흔들렸던 마음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나래는 처음으로, 자신이 먼저 손을 내민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브런치-29화 이미지.png

✍️ 작가의 말

소설을 쓰면서 제가 살았던 후카가와라는 도시가 자주 떠오릅니다.

이번 화에 등장한 농수로는 그 시절 제게 잔잔한 안정감을 주던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다시 글 속에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 초보 작가로서의 작은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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