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30
마침내 기다리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같은 과 사회인 코스 친구들과 쿠시로 습지 하이킹을 1박 2일로 가기로 했다. 안드레아도 함께한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여행을 해본 적이 없던 나래에게, 청정한 자연 속으로의 여행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쁨이었다.
그리고 오늘 수요일은 더욱 특별했다. 중앙 병원 한국어 교실이 있는 날이자, 2주 만에 소에다를 만나는 날이기도 했으니까.
"나래야! 오늘은 후카가와 언덕에 있는 레스토랑을 예약했어. 너와 꼭 가보고 싶은 곳이야."
소에다에게서 이틀 전에 받은 문자. 그 짧은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후카가와에 뿌리내리고 살면서도 아르바이트에 매달려 마트나 잡화점 이외의 세상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던 나래였다.
수요일마다 소에다와 삿포로나 아사히카와에서 함께한 소소한 식사가 그녀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후카가와 언덕의 성당 레스토랑'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특별한 날을 위해 간직해 둔 옷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입었다.
거울 앞에서 서툰 손길로 화장을 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한국에서는 대학생이 된 후에도 화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터라,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며 완벽을 추구했다.
"마음에 드는 화장이 이렇게 힘들었나…" 거울 앞에서 혼잣말을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였고, 어딘가 여성스러운 매력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나래! 오늘 유난히 신경 쓴 것 같은데? 약속이라도 있어?"
오랜만에 만난 미나코가 먼저 눈치챘다.
"미나코짱! 2주 만이네. 잘 지냈어? 오늘은 아무 일도 없어. 방학도 했고, 시간이 있어서 화장 좀 해봤어."
생각지도 못하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소에다와 데이트가 있다고 하면 미나코가 상처받을 게 뻔했다.
가슴 한구석에 죄책감이 스며들었지만, 지금만큼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싶었다.
'나의 감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금은 제일 좋은 거야.'
나래는 평소보다 더욱 활기차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3개월째 이어온 수업 덕분에 모두 인사나 자기소개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어를 가르치며 '일본에서 살게 된다면 한국어 강사를 해보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현재는 중앙 병원 외에도 수영장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주머니들의 아이들 중, 관심 있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도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안드레아에게는 일본어를, 안드레아는 나래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아이들이 서툰 발음으로 "안녕하세요"를 외칠 때마다, 나래의 마음속에는 꽃잎처럼 부드러운 감동이 스며들었다. 한국의 말과 글을 전하는 일이 자신의 천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치 자신이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을 찾은 듯한 충만함이 있었다.
소에다는 한국어 교실이 끝나자마자, 나래보다 먼저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 셔츠 단추 하나를 여유롭게 풀어놓은 모습이었다.
옅은 하늘빛 셔츠가 그의 깊은 눈동자와 절묘하게 어우러졌고, 짙은 남색 로퍼가 발끝까지 세심한 그의 성격을 드러내는 듯했다. 단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차림새가 그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런 모습을 본 순간, 나래의 심장은 마치 새장 속 새가 되어 펄럭거리기 시작했다.
"나래! 이쪽으로 타."
언제나처럼 차 문을 열어주는 그의 자상한 손길. 그 작은 배려에 나래의 얼굴은 복숭아 빛깔로 물들어갔다.
분명 여느 수요일과 다름없는 하루였는데, 둘을 둘러싼 공기만큼은 전혀 달랐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두 마음이 조심스럽게 연결되고 있는 듯한, 그런 미묘한 떨림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차에 오르자, 소에다는 자연스럽게 나래의 안전벨트를 매주 었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순간, 나래는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절로 눈을 감았다. 그의 은은한 향기가 그녀의 감각을 온통 사로잡았다.
차는 부드럽게 엔진 소리를 내며 후카가와 시내를 달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이 공간을 채웠다.
소에다는 오늘따라 말이 많았다.
한국어 교실에서 점점 더 능숙하게 가르치는 모습이 대단하다며 진심 어린 칭찬을 건넸고, "오늘 정말 예쁘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흘렸다. 일본어 실력이 놀랄 만큼 늘었다는 감탄까지.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래의 가슴속에 따뜻한 꽃송이를 피워내는 듯했다.
나래는 은밀하게 그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미소를 지었다. 서른넷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순수한 표정과, 아이처럼 맑은 눈동자. 그 눈 속에는 언제나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빛이 서려 있었다
그는 대체 무엇을 그렇게 간절히 바라고 있는 걸까. 그 알 수 없는 갈망의 눈빛이 나래의 마음을 자꾸만 흔들어놓았다.
차 안의 공기가 점점 뜨거워졌다. 지금까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보이지 않는 벽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더 이상 감추어야 할 마음도, 억누르고 싶은 감정도 없는 것 같았다.
단지 두 사람은 서로만의 시간을 소중히 즐기고 있었다.
차는 언덕을 향해 올라갔다. 후카가와 시내가 점점 뒤로 멀어지자, 따스한 불빛이 은은하게 켜진 성당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고요한 숲 속에 자리한 성당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랑을 지켜봐 온 듯한 고즈넉한 위엄과 성스러운 아름다움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해."
소에다는 성당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정하게 설명했다.
"와… 정말 성스럽네요. 이렇게 아름다운 성당은 처음 봐요."
나래는 눈앞에 펼쳐진 성당의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축복의 공간 같았다.
은은한 조명에 물든 성당은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을 견뎌온 돌 하나하나에 깃든 이야기가 느껴졌다. 세월의 손때가 묻은 돌들이 만들어내는 고요한 아름다움이 두 사람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나래는 성당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사람들이 왜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는지, 단숨에 이해할 수 있었다.
소에다는 신사답게 나래의 차문을 열어주었다. 두 사람은 은은한 달빛과 부드러운 밤공기를 맞으며 자갈길을 천천히 걸었다. 소에다가 나래의 팔을 살며시 잡아주는 순간, 그녀의 심장은 꽃잎이 떨어지듯 설레며 고동쳤다.
레스토랑 내부는 진한 브라운 톤으로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한쪽 코너의 그랜드 피아노, 조도가 낮은 조명 아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클래식 음악.
후카가와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 밖으로 펼쳐진 후카가와 시내의 야경은 마치 땅에 내려앉은 별자리 같았다. 그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나래의 눈동자는 어린아이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나래의 순수한 반짝임을 소에다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호기심과 설렘으로 가득한 나래를 바라보는 소에다의 입가에는 말할 수 없이 다정한 미소가 번져갔다.
그때서야 나래는 깨달았다. 오늘 이 아름다운 곳에 함께 온 진짜 이유를, 소에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그 따뜻한 눈빛의 진심을.
이것은 단순한 저녁 식사가 아니었다. 두 마음이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다가서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시작이었다.
작가의 말: 모기의 입이 돌아간다는 처서가 지나도 여전히 습하고 덥네요.
저는 더운 여름이 참 좋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차가운 방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워서, 불어오는 바람 한 조각에 "아~ 나는 행복하다"를 연신 외치곤 합니다.
돈이 행복이라고 믿는 T 남편과, 시원한 바람 한 조각이 행복이라 믿는 F 아내의 기막힌 동거.
독자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저와 같은 F이신 분들, 혹시 계신가요?
작은 것에서 큰 행복을 찾는 나래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소중한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일상 속 작은 행복들이 반짝이길 바라며 글을 씁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