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의 고백, 사랑의 첫 페이지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31

by 파랑몽상

언덕 위의 기적

후카가와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 성당에서 운영하는 이 레스토랑은 홋카이도에서도 손꼽히는 곳이다.

나래는 창밖으로 펼쳐진 후카가와 시내의 야경을 바라보며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소에다가 자신을 이런 곳에 데려왔다는 것이.

소에다는 키 185센티미터에 안과 의사다.

도쿄 출신인 그가 홋카이도 중앙병원에 부임한 지 벌써 5년째라고 했다.

길고 단정한 손가락, 언제나 차분한 목소리, 그리고 환자들을 대하는 따뜻한 시선까지.

나래가 평생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사람이었다.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소에다 선생님한테 고백한 간호사가 벌써 열 명은 넘을 거야."

"그런데 한 번도 사귄다는 소문이 없어. 정말 신기해."

그런 그가 지금 나래의 맞은편에 앉아 있다.


예상치 못한 선율

"잠깐만."

소에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스토랑 한쪽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 앞으로 향하는 그를 보며 나래는 당황했다.

다른 손님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부탁하신 대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웨이터가 소에다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소에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건반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치 수술할 때처럼 정밀하게 첫 음을 눌렀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1악장이었다.

나래는 숨을 멈췄다.

저 차분하고 절제된 선율이 소에다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달빛이 물 위에 부서지듯 섬세하게 울려 퍼지는 음표들 사이로, 그동안 그가 감춰왔던 마음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레스토랑 안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식기 부딪히는 소리도, 대화 소리도 모두 멈추고 오직 소에다의 연주만이 공간을 채웠다.

나래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진료실에서 보던 진지한 표정, 환자를 대할 때의 그 집중력이 지금 피아노 건반 위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마지막 음이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자, 레스토랑 안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소에다는 조용히 일어서서 나래에게로 돌아왔다.

"선생님, 언제 피아노를..."

나래의 말에 그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좋아했어.
스트레스가 쌓일 때도, 기분이 좋을 때도 늘 건반을 찾곤 했지.

오랜만에 연주한 건데... 괜찮았을까? 오늘은, 나래를 위해서 준비해 봤어."


조심스러운 고백

소에다는 잠시 망설이더니 나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래, 내가... 사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오늘 이곳에 데려왔어."

나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밀려왔다.

병원에서 그토록 인기 있는 그가, 정말 자신 같은 평범한 유학생을...

"처음 나래를 봤을 때부터 이상했어. 마치 시야가 갑자기 선명해진 것 같았달까. 태어나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어."

그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5월에 중앙병원에서 처음 만났던 날,
네가 보여준 그 따뜻한 미소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라.

힘들 때마다 그 미소를 떠올렸어.
그럴 때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옆에 있으면 좋겠다…
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계속 그렇게 생각했어.”

나래 같은 사람은... 정말 처음이야."

나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꿈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감이 없어서 더욱 불안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물어보고 싶어. 나랑 사귀어 줄래?"


현실적인 고민들

나래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봤다.

후카가와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서, 온화한 조명 아래 앉은 소에다는 정말 완벽해 보였다.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두려웠다.

"선생님... 저 같은 사람이 선생님과 정말 어울릴까요?"

나래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그냥 평범한 한국 유학생이에요. 키도 작고, 예쁘지도 않고... 병원에서 선생님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알아요. 간호사 선생님들이 항상 선생님 얘기를 하시거든요."

나래는 한마디 한마디 조심스럽게 이어갔다.

“만약… 나중에 선생님이 저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떡하죠?
저보다 예쁘고, 일본 분이고, 선생님과 더 잘 어울리는 분을…

그런데 그때 저는 이미 선생님께 너무 깊이 빠져 있어서, 벗어나지 못하고 상처만 남을까 봐…
그게 두려워서, 시작하는 게 어려워요. "

소에다는 나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부드럽고 다정함이 스며든 따뜻한 손길이었다.

"나래야, 병원 동료들이 항상 나한테 물어봤어.

언제 결혼하냐고, 누구랑 사귀냐고. 그럴 때마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 곤란했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가 나래의 손을 더 꽉 잡았다.

"나는 나래 때문에 매일이 행복해.
너와 주고받는 메시지, 아르바이트 끝내고 잠깐씩 만나주는 그 순간들…

그 모든 게 내겐 기다림이자 설렘이었어.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던 나의 일상에,
너라는 활력이 들어온 거야.

항상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했고…
이런 마음은, 정말 처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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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만나는 순간

나래는 소에다의 손 위에 살짝 자신의 손을 얹었다.

"무르기 없기예요? 저, 이제부터 선생님 꼭 붙잡고… 안 놓아줄 거예요. 알았죠?’”

나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에다의 진심 어린 고백에, 나래의 눈시울이 어느새 붉어졌다.

‘울면 안 돼…’ 마음속으로 다그쳤지만, 눈물샘은 이미 고장이 난 듯했다.

그 순간, 소에다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그리고 이내 만면에 웃음이 번졌다.

“나야말로… 절대 나래 놓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각오해?”

창밖으로 홋카이도의 초여름이 고요히 흘러가고 있었다.

성당의 종탑에서 울려 퍼지는 시계 소리가 두 사람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나래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꿈은 아닐까.

내일 아침이면 없었던 일이 되는 게 아닐까, 나래는 잠시 두려워했다.

하지만 소에다의 따뜻한 손길과 진심 어린 눈빛이, 지금이 분명한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사랑은 때로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지금, 나래는 그 사랑의 첫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펼치고 있었다.


작가의 말:
나래와 소에다의 사랑의 시작을 쓰면서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저는 소설 속 소에다 선생님과 실제로도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은 서로 왕래를 했지만,
어느 순간 연락이 끊기고 만나지 않게 되더군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경험했습니다.

그래도 가끔씩 기억이 납니다.
제 인생의 어느 한 페이지에, 소에다는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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