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33화
별빛 아래에서 시작된 사랑은 곧 나래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홋카이도의 짧은 여름, 그리고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된 계절.
모든 순간이 빛나고, 사소한 하루마저 특별하게 느껴졌다.
낯선 땅에서 맞이하는 첫여름방학을 그저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시작된 교정은 푸른 잔디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밤이면 시원한 바람이 달빛을 품고 골목을 스쳤다.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걸까? 세상이 다르게 보여.'
소에다의 고백 이후, 나래의 하루하루는 기쁨으로 가득했고, 사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소에다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와 문자를 주고받았다
진료가 바쁜 소에다였지만 나래의 문자에는 되도록이면 빨리 답장을 하려고 노력했다.
여름방학에는 사회인 코스로 들어온 친구들과 함께 쿠시로 습지로의 1박 2일 여행을 계획했다.
물론 나래의 단짝 친구인 안드레아도 같이 가기로 했다.
홋카이도에 와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여행을 해본 적이 없는 나래를 위한 배려였다.
나래는 여행을 가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리고 틈틈이 홋카이도의 여름을 소에다와 함께 즐기기로 했다.
나래는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멈추지 않는 나날을 보냈다.
쯔보하찌에서도 나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갔다.
처음에는 주문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이제는 손님들과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일에 익숙해졌다.
500cc 맥주 10잔을 나르는 것쯤은 거뜬했다.
홀을 누비며 일하는 나래를 60살이 넘은 점장님은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 자기소개도 더듬으면서 하던 네가 이제는 우리 가게에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었으니... 시간이 빠르네."
3개월도 되지 않은 시간 속에 나래는 자연스럽게 쯔보하찌의 식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요즘 가게에서 가장 큰 화제는 따로 있었다.
"나짱, 진짜야? 중앙병원 의사 선생님이랑… 사귀는 거 맞아?"
부점장 하라다의 장난 섞인 농담에 동료들이 일제히 나래를 바라보았다.
"아... 네. 어쩌다 보니 사귀게 되었어요."
나래는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에 땀이 배어들기 시작했다.
"오! 상상도 못 했는데? 나래가 일본인 의사 선생님이랑 사귄다니... 나래, 혹시 첫 키스는 했어?"
굽기를 담당하는 사토우가 옆에서 거들었다.
"네? 키스요? 저, 그러니까... 음... 그러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감출 수 없었다.
"나짱, 설마 아직까지 첫 키스 경험이 없는 건 아니지? 20살이 넘었는데 아직 첫 경험이 없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데?"
정말... 키스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를 사귀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어떻게 키스를 했겠는가.
역시! 없구나! 이런 귀한 아가씨가 우리 가게에 있었네."
하라다가 나래의 옆구리를 툭 건드리며 속삭였다.
"아니! 경험이 없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나래는 큰 소리로 외치고는 탈의실 문을 열어젖혔다.
홀은 순식간에 ‘첫 키스’라는 단어로 가득 차 버렸다.
저녁 7시가 되자 손님들로 가게가 붐비기 시작했다.
나래는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고, 술을 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래!! 남자친구분이 오신 것 같은데?"
부점장이 나래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뒤를 돌아보니 소에다와 안드레아가 나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 안드레아? 어쩐 일이야? 이쪽으로 오세요."
나래는 소에다와 안드레아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하라다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나래에게 다가왔다.
"8번 테이블로 가서 주문받아, 여기는 내가 주문받을게."
"예? 제가 받을게요. 하라다 씨가 다른 테이블로 가시면 안 돼요?"
"어허! 여기는 오빠가 받을 테니까 나래는 5번에 가서 주문받아."
하라다와 소에다는 연신 큰 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래는 그 둘의 대화에 신경이 쓰여 일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하루 일과가 또 이렇게 지나갔다.
아르바이트가 끝난 밤, 후카가와의 공기는 차갑고 맑았다.
여름밤이지만 차가운 공기가 실려있는 바람이 나래를 기분 좋게 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도 열심히 잘 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별빛이 길 위에 흩뿌려지고, 둥근 보름달이 나래의 발걸음을 비추고 있었다.
오늘따라 달은 더 노랗고 환했다. 나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나래야!"
집에 다다른 골목 모퉁이에서 누군가 나래를 불렀다. 소에다였다.
"선생님! 깜짝이야!!"
나래는 너무나 놀라 소에다의 팔에 매달렸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어떻게 해요."
"뭐가 그렇게 좋아서 연신 하늘만 쳐다보는 거야? 그러다가 넘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소에다는 나래의 머리카락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차가운 여름밤공기 속에서 그의 손끝은 유독 따뜻했다.
키 185의 소에다가 158의 나래를 내려다보는 각도에서, 그의 말랑한 입술이 달빛에 희미하게 반짝였다.
나래는 목구멍이 바짝 마르는 듯한 느낌에 침을 삼켰다.
"오늘도 수고했어. 이 조그만 몸으로 열심히 홀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나 안쓰러웠어."
"에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제가 얼마나 힘이 센데요. 저 체력도 엄청 좋은 거 알죠?"
나래는 장난스럽게 팔뚝을 들이밀었다. 소에다는 조심스럽게 나래의 손을 잡았다.
"그러다가 병나면 안 돼. 몸을 아끼면서 일을 해야 돼."
소에다는 나래를 품에 안았다.
소에다의 잔잔하면서 묵직한 오크향이 나래에게 먼저 다가왔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따뜻한 그의 품, 그리고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팔.
나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심장 소리가 나래의 심장에 바짝 와닿아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여름밤,
나래는 처음으로 사랑의 떨림을 온몸으로 느꼈다.
소에다는 천천히 나래의 입술을 향해 다가왔다.
바람의 흐름이, 별빛의 반짝임이, 시간이 멈춰 버렸다.
열흘 동안 글을 놓아두었습니다.
늦은 여름, 푸꾸옥으로 여행을 다녀왔지요.
혹시 제 소설을 기다리신 분들이 계실까......싶습니다.
그곳에서 얻은 건 특별한 재미나 경험이 아니라,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도감이었습니다.
늘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기 계발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분주했는데, 잠시 멈추어 설 수 있었습니다.
쉼이란 것도 삶의 일부라는 걸
비로소 깨달은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