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파스타, 민트 향기, 그리고 외국인 삼총사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46화

by 파랑몽상

홋카이도의 짧은 여름, 외국인 형제와 함께한 나래의 따뜻한 밤.

이탈리아 파스타와 칼루아 밀크, 웃음과 그리움이 뒤섞인 후카가와의 여름밤 이야기.

사랑과 우정 사이, 나래의 마음은 여전히 ‘그 사람’을 향해 있었다.


빈자리를 채운 사람들

후카가와의 여름은 짧다.
너무나 짧아서, 여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이다.

안드레아가 연애에 빠져들면서 나래의 일상에도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그가 Keith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나래를 찾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건 안드레아의 사촌들이었다.

캐나다에서 온 비토와 빈첸조.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두 형제와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영어로 말해야 했다.

서툴고 더듬거리는 영어였지만,

나래는 그 시간들이 싫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밤 11시, 현관 앞의 의식

쯔보하치에서의 아르바이트는 밤 11시에 끝났다.

500cc 생맥주 잔을 수십 번 나르다 보면 어깨가 얼얼해지고, 손목이 욱신거렸다.

오늘도 그랬다.

센트럴 하이츠로 돌아가는 길,
계단을 오르며 나래는 오늘 하루가 참 길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관 앞에는 역시나 그들이 있었다.

편의점 봉투를 들고 서 있던 비토와 빈첸조는
나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굿이브닝, 브라더! 오늘은 어떤 술을 만들어 줄 거야?"

나래가 현관문을 여는 순간부터, 두 사람은

오늘 그들이 어떤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지

앞다투어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이 시간은 하루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은 의식 같은 것이었다.

나래에게도 그랬다.


진짜 이탈리아 파스타

“나래, 오늘은 진짜 파스타 만들어줄게. 토마토 직접 샀어!”

비토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꼭 제대로 된 이탈리아 파스타를 해주고 싶다고 했었다.

나래는 진짜 이탈리아 파스타를 먹어본 적이 없어서 언제나 그 맛이 궁금했다.

그래서 기대가 됐다.

“오늘 가게는 어땠어?”

“Good...”

“손님 많았어?”

“Yes... many people.”

“오늘 일하면서 뭐가 제일 힘들었어?”

“...Yes?”

비토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나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나래! 지금 그건 질문이었어.
‘What was the hardest thing today?’
너 내 영어 알아듣고 있어?”

나래는 멈칫했다.

"너희 둘의 영어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걸 너희들은 모르고 있을 거야.

그래서 듣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

비토는 나래의 어깨를 두드렸다.

"솔직해서 좋아! 괜찮아, 우리가 천천히 말하도록 할게."

웃음 속에서 요리가 시작되었다.

비토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팬넷 파스타를 꺼냈다.

“파스타 면도 종류가 진짜 많아. 오늘은 팬넷으로 해볼게.
토마토 데쳐서 껍질 벗기고, 믹서로 갈아서 소스 만들 거야. 제대로.”

그의 손은 생각보다 능숙했다.
토마토를 데치고, 껍질을 벗기고, 곱게 갈아내는 동안
주방은 점점 더 좋은 냄새로 가득 찼다.

빈첸조는 나래를 위해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나래가 술에 약하다는 걸 알고 있어서
언제나 부드럽고 향기로운 걸 만들어줬다.

오늘은 칼루아 밀크와 스파클링 진토닉.

잔 위에 민트 잎을 조심스럽게 얹으며 그가 말했다.

“파스타에 잘 어울리는 스파클링이야.
아주 약해서 기분만 좋아질 거야.
나래 복숭아 좋아하니까 피치트리도 넣어봤어. 어때?”

나래는 잔에 입술을 가져갔다.
민트 향과 복숭아 향이 코끝을 스쳤다.

홋카이도의 여름밤처럼 상쾌하고, 달콤했다.

나래는 빈첸조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47화 이미지 브런치.png

건배, 그리고 즐거운 저녁의 시작

“건배!”

셋이 잔을 부딪쳤다.
나래는 포크로 팬넷을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진한 토마토 소스와 부드러운 치즈의 고소함이 입안을 감쌌다.
뒤이어 마신 스파클링 칵테일의 기포는 혀끝에서 잔잔하게 터졌다.

“와, 이런 파스타 맛은 진짜 처음이야.”

마트에서 파는 시판 소스에 익숙했던 나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엄마가 이탈리아 사람이셔.
어릴 때부터 주방에서 이것저것 도와드리면서 배웠지.”

비토는 으쓱하며 웃었고,
빈첸조는 나래에게 칵테일을 한 잔 더 만들어 주었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어 새벽 2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형제는 음악을 틀었고,
나래는 처음 듣는 리듬에 몸을 맡겼다.

춤을 춘 건 아니었지만, 마음은 음악의 리듬을 따라 조용히 떠오르고 있었다.


문득, 소에다

빈첸조가 또 한 잔을 만들어주려 하자 나래는 손을 저었다.

"나 술에 약한 거 알잖아. 오늘은 그만 마실게..."

“Happy?”

“...Yes.”

그런데 문득, 소에다가 생각났다.

지금쯤 그는 뭘 하고 있을까.
혼자 조용히 책을 읽고 있을까.
아니면 병원 당직실에서 환자 차트를 보고 있을까.

이 시간, 그도 나처럼 누군가와 웃고 있을까.

비토와 빈첸조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은 분명 즐거웠다.
서툰 영어, 어색한 농담, 배를 잡고 웃는 시간.

모든 것이 가볍고 편안했다.

하지만 소에다와 함께 있을 때는 달랐다.
그와의 시간은 가벼움보다 무게가 있었다.

그를 만날 때면 나래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게가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무게 때문에,
나래는 소에다에게 진심을 다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좋지만, 나래가 진짜 기다리는 건

소에다와의 시간이라는 것을.

안드레아가 연애에 빠져 멀어진 자리에 찾아온 두 사촌.
그들은 말보다 웃음이 더 많았고,
그 웃음 속에서 나래는 잠시나마 혼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웃고 있는데, 마음 한구석이 외로웠고

즐거운데, 소에다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렇게, 나래의 여름은 소에다라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채워지고 있었다.


✍️ 작가의 말

오늘부터 일본 도쿄로 여행을 떠납니다.

딸아이가 그렇게 가고 싶다고 하는 도시입니다. 나중에 꼭 일본에서 살고 싶다고 하네요.

저는 도쿄에서 딱 6개월 어학연수를 했습니다. 21살 때였으니 이미 25년도 더 지났네요.

그때는 한국인에게서 김치 냄새가 난다고 방도 빌려주지 않았던 시절인데... 지금은 한국의 위상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25년 전, 혼자 낯선 도쿄를 헤맸던 스물한 살 소녀가, 이제는 엄마가 되어 딸과 함께 그 도시를 걷습니다.

나래가 홋카이도에서 보냈던 시간들처럼, 제 딸도 이 여행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길 바라며.

잘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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