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47화
새벽 네 시.
나래는 김밥을 말다가 멈췄다.
밥을 너무 많이 넣었다.
김이 찢어질 것 같았다.
다시 펼쳐 밥알을 덜어냈다.
손가락에 밥알이 다 달라붙었다.
마지막 김밥을 말고,
참기름을 쓱쓱 발랐다.
소에다가 좋아할까.
아니,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손끝이 잠시 멈췄다.
후카가와의 새벽은 아직 어두웠다.
그와 함께 떠나는
1박 2일 여행은 처음이었다.
나래는 거울 앞에 섰다.
밀짚모자를 썼다 벗었다, 다시 썼다.
챙이 너무 넓은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래서 좋은 것 같기도 했다.
하늘빛 원피스. 미니 기장이 괜찮을까.
나이 들어 보이지는 않을까.
손목시계를 봤다. 아직 30분이나 남았다.
베란다에 나가 페튜니아에 물을 주었다.
자주색 꽃잎에 물방울이 맺혔다.
한국에 있을 때는 화분 하나 키워본 적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자연스럽게 베란다에 나가 꽃을 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멀리서 파란색 차 한 대가 보였다.
햇빛에 반짝이며 다가오는 차.
소에다였다.
나래는 가방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천천히 가려고 했는데, 발이 빨라졌다.
"여기요, 여기!"
차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소에다가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렸다.
그가 웃었다.
"왜 미리 나와 있었어? 전화하면 나오지."
"첫 여행인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이렇게 좋아서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나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리고 이거, 김밥 만들었어요."
도시락을 들어 보였다.
소에다의 눈이 커졌다.
"직접?"
"네, 새벽부터 일어나서요."
사실은,
같이 가는 첫 여행이라 긴장이 돼서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소에다는 나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순간, 나래의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아침 식사 안 하셨죠?
김밥 하나 드셔 보세요."
나래는 도시락을 열어 김밥 하나를 집어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고소한 참기름 향이 차 안에 퍼졌다.
소에다는 천천히 김밥을 씹다가
나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래는 숨을 죽였다.
"... 맛있는데?"
"정말요?"
"응. 진짜 맛있어."
나래는 그제야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차가 출발했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후카가와에서 후라노까지는 70킬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소에다가 말했다.
나래는 커피를 홀짝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쯔보하치에서 있었던 일, 비토와 빈첸조 이야기, 안드레아 근황.
소에다는 운전하면서 가끔 고개를 끄덕였다.
나래를 보는 그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나래는 늘 재미있는 일이 많네."
"선생님은요? 병원에서 재미있는 일 없어요?"
"병원은... 그냥 똑같지."
소에다가 잠깐 말을 멈췄다.
"도쿄에 있을 때도 그랬어.
똑같은 하루, 뭔가 숨이 막히는 기분."
나래는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홋카이도로 오신 거예요?"
"응."
소에다의 손이 핸들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나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
그가 말했다. 그리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차 안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나래는 창밖을 봤다.
지나가는 들판, 낮은 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그래도 여기 와서... 나래 같은 사람 만나서 다행이야."
소에다가 조용히 말했다.
나래는 숨을 멈췄다.
'나래 같은 사람.'
그 말이 가슴 어딘가를 건드렸다.
"저도요. 선생님 만나서... 다행이에요."
나래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또 침묵이 왔다.
하지만 그건,
불편하지 않은 공기 속에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침묵이었다.
"저기 봐요!"
나래가 소리쳤다.
넓은 대지 위에 색색의 꽃들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빨강, 노랑, 주황, 보라.
라벤더는 이미 시들었지만,
대신 다른 꽃들이 여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라벤더 없어도 괜찮아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나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뛰어갔다.
밀짚모자가 바람에 날아갈 뻔했다.
손으로 살며시 모자를 눌러 잡았다.
"선생님! 여기 봐요, 이 꽃!"
나래는 램스 이어를 만지며 소에다를 불렀다.
"만져보세요. 진짜 양의 귀 같아요."
소에다는 천천히 걸어와 그 식물을 만졌다.
"정말 부드럽네."
하지만 그는 꽃보다
나래의 옆모습을 더 오래 지켜보았다.
나래는 꽃밭 사이로 난 길을 걸었다.
소에다가 뒤따라왔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땅에 나란히 늘어졌다.
"사진 찍어주세요!"
나래가 말했다.
"응... 나래, 여기 서봐.
꽃이 너무 아름답게 피었어."
나래는 꽃밭 앞에 섰다.
밀짚모자를 살짝 올려 얼굴이 보이게 했다.
그리고 소에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소에다는 휴대폰을 들었다가 내렸다.
"뭐 하세요?"
"아, 미안. 각도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나래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진 잘 못 찍으세요?"
"... 잘 안 찍어봐서."
소에다가 머쓱하게 웃었다.
나래는 그의 옆으로 가서 함께 화면을 봤다.
그의 어깨에서 오크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이렇게요. 여기 누르면 돼요."
"아, 이렇게?"
찰칵.
사진 속 나래는 웃고 있었다.
환하게.
"한 장 더 찍어요.
이번엔 선생님도 같이요."
"나도?"
"당연하죠. 첫 여행인데."
나래는 소에다의 팔을 잡아끌었다.
지나가던 관광객에게 부탁했다.
"스미마셍, 샤신 오네가이시마스."
두 사람은 꽃밭 앞에 섰다.
나래는 소에다의 팔짱을 살짝 꼈다.
그가 긴장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찰칵.
사진 속에서,
나래는 웃고 있었다.
소에다는 그런 나래를 지긋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나래! 여기는 라벤더 아이스크림이 유명해.
우리 아이스크림 먹자!"
소에다는 나래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완벽한 연한 보라색의 라벤더 아이스크림.
나래는 살며시 혀를 가져다 대었다.
라벤더의 향기가 입안 가득 퍼졌다.
"맛있지?"
"음...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한 맛인데요?"
나래는 자기 아이스크림을 소에다의 입 앞에 가져갔다.
"선생님도 드셔보세요."
소에다는 잠깐 망설이다가 한 입 베어 물었다.
"... 달콤하네."
"그렇죠?"
나래는 다시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방금 소에다가 베어 문 그 자리를.
잠깐, 이거... 간접 키스 아닌가.
나래의 얼굴이 빨개졌다.
"왜?"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에다가 웃었다.
알고 있다는 듯이.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햇살이 따가웠다.
하지만 바람은 시원했다.
"내년에 또 오자."
소에다는 살며시 나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네?"
"라벤더 필 때, 6월 말쯤?
그때 다시 오자."
나래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소에다를 봤다.
"... 내년에도?"
"응. 나래랑."
그 말에 나래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년.
내년에도 우리는 함께 있을까.
그런 미래를 상상해도 되는 걸까.
"좋아요. 약속해요."
나래는 작게 대답했다.
소에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꽃밭에서 불어오는 바람,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
나란히 앉은 두 사람.
홋카이도의 여름 한가운데서,
나래는 문득 생각했다.
아, 나는 지금 행복하구나.
그리고 동시에 불안했다.
이 행복이 너무 빨리 지나가버리면 어쩌지.
나래는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핥았다.
최대한 천천히.
일주일 동안 일본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사춘기 딸과 함께한 이번 여행은
예상대로,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어요.
새벽같이 일어나 세 시간씩 화장을 하는 딸을 보며
‘이게 바로 사춘기구나’ 싶었습니다.
일본의 갸루 화장을 꼭 해보고 싶다는 딸의 말에
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나왔던,
조금은 어려운 여행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도쿄의 달라진 모습,
예전보다 더 활기차고 세련된 거리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 그 변화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긴 소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