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52화
후라노 여행 마지막 날 아침, 달콤한 시간을 보내던 나래와 소에다에게 갑작스럽게 걸려온 국제전화.
"준철 오빠"라는 이름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순식간에 바꿔놓는다.
암막 커튼이 마지막 빛까지 차단하고 있는 호텔 객실.
어둠 속에서 나래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핸드폰 화면에 표시된 시간은 오전 9시.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었다.
어제 밤 마신 맥주 때문인지 몸 구석구석이 무거웠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활짝 열었다. 후라노의 아침 햇살이 물결치듯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빛이 그녀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웠다.
"잘 잤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에다의 목소리. 막 잠에서 깬 목소리였지만 눈가에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침 햇살에 물든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해 보였다.
"어젯밤에는 정말 죄송했어요. 온천욕 후에 마신 맥주 한 잔에 완전히 취해버린 것 같아요."
나래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소에다의 품에 안겼다.
그의 체온이 전해지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평안함이 스며들었다.
"괜찮아. 아무런 실수도 없었고, 그저 조용히 잠들었을 뿐이야. 두통은 어때? 많이 나아졌어?"
소에다는 나래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두통도 전혀 없고 컨디션도 좋아요. 다만... 이렇게 부은 얼굴로 선생님을 마주하기가 조금 부끄럽네요."
나래는 그의 품속에서 얼굴을 파묻듯 숨겼다. 달콤한 샴푸 향이 소에다의 코끝을 간질였다.
소에다는 그녀를 더욱 꼭 안았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바라보던 그녀가 지금 이렇게 자신의 품 안에 있다는 현실이 꿈만 같았다.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가슴에 닿을 때마다,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러다가는 조식 시간을 놓치겠어. 슬슬 준비해볼까?"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나래의 이마와 입술에 키스했다.
그 순간 나래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빨리 준비하고 조식 먹으러 내려가요."
호텔 1층 조식당은 이미 투숙객들로 활기가 넘쳤다.
갓 내린 커피의 쌉싸름한 향이 나래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소에다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특별함을 더해 주었다.
"와, 정말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가득하네요!"
나래는 눈을 반짝이며 조식 뷔페를 둘러보았다.
갓 구운 모닝빵, 바삭한 베이글, 부드러운 식빵, 버터가 층층이 쌓인 크루아상,
그리고 홋카이도 특산품인 신선한 요거트와 우유까지. 그녀의 설레는 표정에 소에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에다는 테이블로 돌아와 따뜻한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나래, 천천히 여유롭게 먹어. 오늘은 서두르지 말고 충분히 아침을 즐기자."
그의 말에 나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싱그러운 여름 햇살이 호텔 유리창을 통해 은은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다른 투숙객들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아침 식사를 즐기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아름다운 여름 풍경 속에 자신도 함께 있다는 사실이 마치 한 폭의 그림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나래는 의자에 기대어 어제 밤 함께 산책했던 닝구르 테라스를 바라보았다.
신기하게도 오늘의 그곳은 어제보다 더욱 조용하고 따뜻해 보였다.
그 장소에서 나눈 소에다의 진솔한 고백이 아직도 그녀의 가슴 한편에 따스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소에다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어제 밤 처음으로 털어놓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그는 지금까지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솔직하게 말한 적이 없었다.
결혼까지 약속했던 그녀를 그렇게 떠나보낸 후, 용서를 구하지도 못한 채 마음 한구석에 묻어둔 죄책감.
그것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결코 옅어지지 않는, 가슴 깊은 곳의 그림자 같은 감정이었다.
그런데 지난 5월, 병원 바비큐 파티에서 처음 마주친 나래는 그 모든 무거운 감정들을 한순간에 가볍게 흔들어 놓았다. 햇살 아래서 반짝이던 그녀의 맑은 눈동자, 단발머리에 어리면서도 투명했던 미소를 본 순간,
소에다는 처음으로 과거가 아닌 현재를 바라보고 싶어졌다.
"왜 그렇게 바라보고 계세요? 제가 그렇게 예뻐 보여요?"
나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질문했다. 그녀의 눈이 초승달처럼 구부러졌다.
"언제나 예뻐, 지금도 앞으로도... 그러니까 나만 믿고, 나만 바라봐줘."
소에다는 나래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작은 손이 그의 손 안에서 따뜻하게 녹아들었다.
나래도 살며시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이런 곳에 와보니까...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정말 싫어져요. 아르바이트도, 학교 수업도... 지금은 모든 것이 꿈만 같아요."
나래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렇다면 하루 더 머물러볼까? 나는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돼요... 지금이 여름 성수기라서 쯔보하찌가 너무 바쁜 상황이에요. 아쉽지만 저에게는 1박 2일이 최선이에요."
소에다는 아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이 달콤한 시간이 끝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래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국제전화였다.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
"여보세요?"
나래는 한국어로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표정에 순간적으로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준철 오빠?"
'오빠?'
그 한 단어가 소에다의 귀에 또렷하게 꽂혔다. 그는 커피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순간 주변이 고요해졌다. 온 신경이 나래의 전화기로 쏠렸다.
그러나 그런 소에다의 마음을 모르는지 나래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가을에서 겨울로 점프해 버린 듯한 날씨네요.
홋카이도에는 벌써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이런 계절이 오면, 유난히 홋카이도가 그리워집니다.
올겨울, 혹시 홋카이도로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 분 있으신가요?
하얀 눈 내리는 그곳에서의 겨울은 언제나 마음속 한 장면처럼 남아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