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끝에서 울리는 목소리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53화

by 파랑몽상

후라노에서 후카가와로 향하는 길, 홋카이도의 대지 위로 과거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 통의 국제전화는 나래의 첫사랑을 되살아나고, 현재의 사랑과 충돌하며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홋카이도의 하늘은 한국보다 높아 보인다

산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일까.

끝없이 펼쳐진 초록 융단,

저 멀리 홋카이도의 중심처럼 우뚝 솟아 있는 대설산의 꼭대기엔 한여름이지만 만년설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아래로는 끝을 알 수 없는 대지가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저 들판 어딘가에, 초록색 지붕을 얹은 빨간 머리 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래는 생각한 적이 있다.

라디오에선 유즈의 '사요나라 버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래가 너무나 좋아하는 남성 듀엣으로 CD까지 샀던 곡이다.

후렴구를 따라 부르던 추억이 입술 끝에 맺혔다.

하지만 오늘은 따라 부르지 않았다.

소에다는 운전 중 슬쩍 나래를 바라보았다.

조잘거리던 평소와 달리, 나래는 오늘따라 말없이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 표정엔 알 수 없는 생각의 흐름이 묻어 있었다.

소에다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나래의 손을 감쌌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고, 나래는 천천히 돌아보며 웃었다.

"아까 전화... 한국에서 온 거였어? 누구였어?"

소에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해야 하나, 말지 말아야 하나.'

나래는 입술을 깨물었다. 소에다의 따뜻한 손이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숨기고 싶지 않아. 선생님한테는.'

나래는 짧게 숨을 내쉰 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말투로 대답했다.

" 대학교 때 친했던 동아리 선배가 오랜만에 전화를 했어요."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제가 짝사랑했던 사람이었어요."

소에다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래를 잡고 있던 손에 미세하게 힘이 들어갔다. 나래는 그걸 느꼈다.

"그런데 그 오빠는 끊임없이 여자를 사귀었어요. 잘 생기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나래는 손에 쥔 가방끈을 천천히 감았다 풀었다.

"다시 말하면 시작도 못해보고 끝난 짝사랑?"

그녀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소에다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래는 알았다. 그 미소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조금 더 얇았다. 조금 더 차가웠다.

정적이 흘렀다.

나래는 소에다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지금은 선생님이 제 옆에 있잖아요. 제가 얼마나 선생님을 좋아하는지... 알죠?"

그 말 한마디에 소에다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마음 한편엔 미세한 긴장이 남아 있었다.

"응, 그래. 나래야. 피곤하면 자도 돼. 후카가와에 도착하면 깨울게."

소에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았다.


동아리방, 그날

동아리방에서 준철 오빠는 여자친구를 무릎에 앉혀놓고 연신 입맞춤을 했다.

주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래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동아리에서 유명한 커플이었다.

여자 친구가 있어도 나래는 준철이 마냥 좋았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 때 준철이 검도하는 모습을 본 순간부터 나래는 온통 준철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유머러스한 성격에 언제나 후배를 잘 챙기는 선배,

유독 나래에게 짓궂은 장난을 잘 쳤던 선배.

나래는 그것이 자신에게 조금은 마음이 있어서 하는 행동이라고 착각했다.

술, 게임을 좋아했지만 그래도 나래는 호탕하면서 나래에게 장난을 잘 치는

준철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 좋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준철에게 나래는 여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친한 후배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래는 용기를 내서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오빠, 저... 오빠를 많이 좋아해요."

그날의 준철의 표정을 지금도 나래는 잊지 못하고 있다.

아연질색한 표정으로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지면서 말을 더듬으며 "농담이지?" 하면서 큰소리로 웃었다.

"나래야, 너 우리 사이 어색해지게 왜 이래? 너는 그냥 내 후배일 뿐이야. 친한 후배."

미안.

그 말이 가장 아팠다.

그날 이후, 나래는 선배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동아리를 그만두었다.

시작도 못해보고 끝난 첫사랑.


2년 만의 전화

그런데... 나래에게 명확하게 선을 그었던 선배에게 2년 만에 전화가 온 것이다.

나래의 머릿속엔 여전히 그 말이 맴돌았다.

"그냥... 네가 생각나서 전화했어."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리 마음이 흔들릴까.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된 걸까?

아니면 그냥 그저, 옛 추억이 생각나서 전화한 것뿐일까?

소에다에 대한 사랑과는 다른, 처음 느꼈던 그 찌릿한 감정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어느새 우타다 히카루의 First Lov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첫사랑의 마지막 순간을 노래하는, 애절한 목소리.

나래는 눈을 감았다.

소에다는 그런 나래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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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우타다 히카루의 'First Love'라는 노래, 알고 계신가요?

저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늘 이런 생각을 해요.

"세상에,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고요.

최근에 방영된 일본 드라마 '하치코이(첫사랑)'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옛 기억이 떠올라 눈물이 났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노래가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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