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왜 잊히지 않을까

홋카이도그녀,이나래-54화

by 파랑몽상

돌아온 집, 아직 남은 온기

여행에서 돌아온 집은 이상하리만치 낯설었다.
단 하루를 비웠을 뿐인데도, 마치 한 달쯤 세상 밖을 떠돌다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창문을 활짝 열자 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며, 익숙했던 냄새들을 천천히 밀어냈다.

소파에 몸을 기댄 나래는 눈을 감았다.
소에다의 품에서 깨어났던 그 아침의 온기, 그의 심장 소리, 체온, 향기, 손끝의 따스함까지 —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그와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영원처럼 느껴졌다.
사랑받는다는 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황홀함이었다.
그런데 확고하다고 믿었던 그 마음이, 준철의 전화 한 통에 너무도 쉽게 흔들려 버렸다.


잊은 줄 알았는데

‘난 왜... 왜... 아직도 준철 오빠를 잊지 못한 거야.’

잊었다고 믿었다.
이미 가슴 깊숙이 묻어버린, 아픈 짝사랑이었다.

“그냥...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준철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그 변함없는 따뜻함이, 오래된 감정을 다시 흔들어놓았다.
봄비를 맞은 새싹처럼, 잊은 줄 알았던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검도 체육관에서 처음 봤던 날 —
짙은 네이비색 도복에 호구를 쓴 준철은
빠르게 죽도를 휘둘러 상대의 머리를 치고, 순식간에 뒤로 빠졌다.
그 한 동작만으로도 그는 자신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 순간, 허무하게도 사랑에 빠졌다.

항상 후배들 술값을 내주며 모두를 웃게 만들던 미소,
대련 후 호구를 벗을 때의 땀 냄새와 붉은 이마,
그 모든 것이 나래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나 좋아하지 마라. 상처받는다.’
무심히 내뱉던 그 말이
그땐 관심이라 믿었는데, 아니었다.

준철은 바람둥이었다.
동아리 안에서도, 여자 후배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도 나래는 그 사람의 눈빛 하나,
장난기 어린 미소 하나를 잊지 못했다.

“정신 차려, 이나래. 지금 너한테 소에다 선생님이 얼마나 잘해주는데.”

나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냉장고로 걸어가 시원한 보리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하얀 레이스 커튼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마치 자신의 마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띵동.”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브런치 이미지 53화.png

안드레아가 알아챈 것

문을 열자 안드레아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나래! 여행 어땠어? 너 좋아하는 살라미 피자 주문했어. 같이 먹자!"

키스와의 데이트가 없는 오늘, 안드레아는 나래를 보러 찾아온 것이었다.

"네 발자국 소리만 기다리며 하루 종일 있었어! 얼른 여행 이야기부터 들려줘!"

안드레아는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들어가 접시와 포크, 나이프를 꺼내오며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안드레아, 그건 그렇고 비토랑 빈첸조는 어디 갔어?"

"걔네들은 캐나다로 돌아가기 전에 하코다테로 3박 4일 여행 갔어. 아마 너랑 얼굴 보기 힘들 걸? 여기저기 여행 계획을 몽땅 잡아놨거든."

피자 한 조각을 베어 물며 안드레아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서, 나래! 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줘야 해. 너랑 소에다... 달콤한 밤 보냈어? 안 보냈어?"

"누구보다 기대했던 사람은 나인데... 안타깝게도 그런 밤은 없었어."

안드레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오 마이 갓! 소에다, 정말 신사야! 아니면 자제력이 미친 거야?”

그 말에 나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러게 말이야. 심지어 둘 다 노천탕에서 목욕도 다 하고 나왔는데... 사실 어이없게도 내가 술에 취해서 잠들어버렸거든."

안드레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과 웃음 속에서 긴장이 점점 풀어졌다. 그리고 나래는 용기를 냈다.

"안드레아... 사실 나 고민이 있어."

목소리가 떨렸다.

"나 바보같이 아직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안드레아가 깜짝 놀라 나래의 손을 꼭 잡았다.

"무슨 일이야, 나래? 이번 여행에서 무슨 일 있었어?"

나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입을 열었다.

"소에다 선생님은 너무 좋아. 내 남자친구인 것도 너무나 자랑스럽고.

그런데 내 안에서 자꾸 다른 누군가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설마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나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참았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첫사랑한테서 전화 한 통 오니까 내가 너무 흔들리는 거야."


당연한 감정, 하지만

안드레아는 나래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며 말했다.

"나래, 그 감정 너무 당연한 거야.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은 평생 마음속에 남는 법이니까.

그래서 첫사랑인 거고."

나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안드레아의 위로조차 마음 깊숙한 곳의 혼란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네 옆에서 지금 너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 봐. 지금 넌 일본에 있고, 그 첫사랑이라는 사람은 한국에 있잖아."

"그래... 맞아. 소에다 선생님이 지금 내 옆에 있잖아."

나래는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안드레아도 그걸 눈치챘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래, 너 정말 괜찮아? 뭔가... 많이 흔들린 것 같은데."

"응,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나래 자신도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준철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고, 소에다와 함께했던 따뜻한 순간들조차 흐릿해지는 것만 같았다.


답장할 수 없는 밤

안드레아가 돌아간 후, 나래는 홀로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바라봤다.

준철의 연락처가 화면에 떠올랐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뭐지?'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소에다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나래, 잘 쉬고 있어? 오늘 잘 쉬고 내일부터 아르바이트 힘내고. 사랑해. 언제나 사랑해."

나래는 메시지를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왜 자꾸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답장을 보내려다 말고, 나래는 휴대폰을 소파에 던져놓았다.

지금 당장은... 어떠한 답장도 할 수가 없었다.

창밖에는 어둠이 내렸다. 홋카이도의 10월은 차갑고 고요했다.

나래는 그 고요 속에서 혼자 앉아,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곳을 알 수 없었다.

"첫사랑은 왜 이렇게 오래 남는 걸까.

아니, 첫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더 오래 남는 건 아닐까."



작가의 말

저는 대학 시절, 동아리 활동으로 검도를 했답니다.
그리고 지금은 검도 2단 유단자이기도 해요. �

사실 그때, 좋아했던 사람이 있어서 오랫동안 짝사랑도 했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그 사람이 좋았을까요?
아마도 그 시절의 순수함 때문이었겠죠.

혹시 여러분은 대학 때 어떤 동아리 활동을 하셨나요?
그 시절의 첫사랑,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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