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무시가 날리는 오후, 김치를 고르다

홋카이도 그녀 , 이나래-55화

by 파랑몽상

소에다의 존재

준철 선배는 가끔씩 습관처럼 술에 취해서 전화를 했다.

나래가 한국에 있을 때에도 그랬다.

희망고문처럼, "그냥 생각나서..."라는

말 하나 툭 던져 놓고는 나래의 반응을 지켜보곤 했다.

나래는 그 한마디에 접었던 마음을 다시 펴고 준철이 자신을 돌아봐 주길 기대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나래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 그녀 곁에는 단단히 뿌리내린 사람이 있었다.

소에다는 변하지 않는 소나무 같은 사람이었다.

수요일마다 열리는 한국어 교실이 끝나면, 그는 언제나 나래를 위해 분위기 좋은 식당을 예약했디.

도쿄나 지방에 학회가 있는 날을 제외하곤, 소에다의 일정은 늘 나래가 중심에 있었다.

짧은 시간이라도 하루에 한 번은 꼭 나래를 보러 왔다.

그런 사람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어디에든 안전 장치가 있는 것 같은 평온함이었다.

나래는 소에다가 있는 삶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가끔 이 평온함이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불안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생각은 곧 사라졌다.

소에다가 웃으면 모든 게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짧지만 강렬했던 여름방학이 끝났다.

온 마음으로 사랑을 주고받았던 시간들. 그리고 그녀는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4월과는 다른 얼굴로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축제 준비

10월에 들어서자 대학은 가을 축제로 들썩였다.

작은 단기대학이지만, 각 학과마다 주제를 정해 부스를 만들고,

공연과 전시를 준비하는 등 제법 들뜬 분위기였다.

10월 중순이 되면 홋카이도는 겨울을 준비한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 보면 '유키무시'라는 날벌레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눈 내리는 것을 알리는 벌레라고 했다.

나래는 유키무시 사이를 뚫고 지나갈 때마다 '아, 자전거를 탈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낙엽은 이미 다 떨어져 나무들은 월동에 들어갔다. 들판의 모든 작물들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등굣길 옆을 따라 흐르던 물소리도 어느 순간 차갑게 들리기 시작했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시원함을 느꼈던 게 1년은 더 된 것 같았다.

홋카이도의 겨울은 생각보다 나래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호카이도 그녀 이나래 이미지 브런치 55화.png


"나래! 자신 있는 한국 음식이 있을까?"

교수님의 질문에 나래는 순간 머뭇했다가, 조금 쑥스러운 듯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 지지미요. 혹시 아실지 모르겠지만 한국식 오코노미야키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래도 한국 하면 김치니까 김치 부침개를 축제 때 팔면 어떨까요?

그리고 매운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야채 부침개도 함께 만들어서 팔면 될 것 같아요."

"오! 좋네, 좋아! 그럼 나래가 각자에게 역할을 분담해 줘. 다들 열심히 축제 준비를 하자.

우리 제미가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는 거야, 알았지?!"

나래가 속한 제미(ゼミ, seminar)는 유일하게 한국 유학생이 속해 있다는 이유로

'한국 음식 판매'라는 콘셉트로 부침개를 이번 축제에 내놓기로 했다.

그리고 제미의 수장은 자연스럽게 나래가 되었다.

"마사랑 슌스케는 나랑 장을 보러 가자. 다른 사람들은 집에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있으면 가져오고,

커다란 프라이팬과 뒤집개를 준비해 줘."

나래는 각자에게 역할을 분담했다. 그리고 자동차가 있는 마사와, 나래를 잘 따르는 슌스케와 맥스밸류(MaxValu)로 장을 보러 갔다.

사실 축제가 시작되기 전부터 나래는 도파민이 터졌다.

한국 음식을 잘 모르는 대학 사람들과 후카가와 사람들에게 부침개를 만들어 팔 생각을 하니 제대로 만들어서 팔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처음 나래가 후카가와에 유학을 왔을 때 순진할 정도로 한국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한국 사람들은 쌀을 먹냐, 젓가락을 쓰냐, 숟가락도 쓰냐... 등등 수없이 많은 질문을 받았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한국 음식에 대해서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힘 잔뜩 주고 마트에 들어섰다.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그때 나래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소에다 선생님'.

"나래? 지금 어디야? 오늘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걱정돼서 전화했어."

"선생님, 저 지금 장보고 있어요. 지금 진료 시간 아니에요?"

"응. 잠깐 시간이 나서 나래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차도 없는데 어떻게 장을 보러 갔어?"

"선생님 마사라고 아시죠? 저한테 사귀자고 고백했던 친구요. 하하. 그리고 슌스케랑 같이 왔어요!"

"아, 마사! 조금 위험한데? 나래를 좋아하는 친구라서."

소에다는 투정 아닌 투정 부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귀여운 질투였다. 나래는 그게 좋았다.

"오! 선생님, 지금 다 들릴 정도로 선생님 목소리 큰 거 알죠? 다들 제 남자친구한테 전화 왔다고 제 옆에 바싹 붙어 있어요. 저는 선생님만 보여요. 알죠? 걱정 마세요."

그 순간, 나래는 왜인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먹먹해졌다. '저는 선생님만 보여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문득 준철 선배의 얼굴이 스쳤다.

왜 지금, 이 순간에.

나래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선생님 많이 보고 싶어요."

"사랑해 나래."

갑작스러운 소에다의 고백이었지만 그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나래는 자신의 어깨에 붙어서 온통 전화기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는

마사와 슌스케를 손으로 때려 쫓아버렸다.

"선생님, 이제 그만 끊어요. 애들이 저 놀려요."

"그래 나래야. 저녁에 시간 있으면 잠깐 보자. 집으로 갈게."

전화를 끊고 나니 입가에 미소가 남았다. 이런 사람이었지. 바쁜 와중에도 전화 한 통 잊지 않는.

그런데 왜일까. 가슴 한쪽이 계속 무거웠다.

"나래, 의사 선생님이랑 너무나 달달한 거 아냐? 부러운데."

마사의 말에 나래는 웃으며 대답했다.

"너희한테는 백 년 일러. 얼른 장이나 보자."

기름과 밀가루, 김치 등 필요한 재료들을 카트에 담았다. 두 대의 장바구니가 가득 찼다.

나래는 창밖을 봤다. 저녁 7시 넘어서 소에다가 올 거였다.

괜찮아. 소에다를 보면 준철의 의미 없는 전화에 흔들리는 나래의 마음은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양파 눈물

대학 조리실로 돌아온 나래와 제미 친구들은 오징어 껍질을 벗기고

야채를 다듬기 시작했다. 다음 날부터 이틀간 축제가 시작되니, 미리 재료를 손질해 두는 것이 중요했다.

"나래, 아까 전화받을 때 정말 행복해 보였어!"

"정말 소에다 선생님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보기 좋다."

나래는 부끄러워하며 대파를 썰었다.

"그래, 이 누님이 남자를 보는 눈이 정확하지? 그런데 양파랑 파를 썰었더니 눈물이 멈추질 않네."

나래는 연신 눈을 훔치면서 칼질을 했다.

창밖은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5시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칼질을 멈추고 창밖을 봤다. 자신이 지금 와 있는 곳이 홋카이도라는 것이 상기되었다.

나래는 다시 대파를 썰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칼질이 경쾌했다. 아니, 경쾌해야 했다.

나래는 오늘 저녁에 만날 소에다를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 시작될 축제를.

모든 게 순조로웠다. 모든 게 행복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가슴 한쪽 구석에서, 지워지지 않은 작은 불안이 자꾸만 올라왔다.

혹시 준철이 다시 전화를 하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품고 있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마음 한편은 분명히 그 가능성을 붙들고 있었다.

나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괜찮아.
소에다 선생님이 내 옆에 있으면… 정말 괜찮아.




작가의 말

처음 일본에서 대학 축제를 할 때 저는 진짜 부침개를 팔았습니다.

제미 친구들과 상의를 하다가 한국 유학생이 있으니 한번 팔아보자는 것에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저는 무엇이든 열정적으로 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저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안갯속을 헤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20대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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