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56화
10월 중반으로 향해가는 후카가와의 공기는 어느새 겨울을 한 발 앞서 맞이하려는 듯,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해가 부쩍 짧아졌고, 저녁바람의 끝은 손등이 얼얼할 만큼 차가워졌다.
나래는 두어 번 어깨를 굴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은 벌써 하루 일을 끝낸 듯 무표정하게 어둠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아이고... 힘들다."
나래의 입에서 절로 나온 탄식은 솔직하고도 가벼운, 어쩐지 나래다운 말투였다.
며칠째 이어지는 축제 준비와 아르바이트 탓에 다리는 무겁고 어깨는 붓기라도 한 듯 결렸다.
생각보다 많은 일본 학생들이 한국 음식에 관심을 보였다.
나래가 만든 부침개를 꼭 사 먹겠다는 사람들까지 생기면서
마음 한구석엔 설렘과 부담이 함께 자리 잡았다.
'만약 맛없다고 하면 어쩌지...?'
그 걱정이 사소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나래에겐 꽤나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어젯밤엔 부침개 반죽 비율을 잡겠다고 새벽까지 부추와 당근을 다듬었다.
불 앞에서 뒤집는 타이밍을 수없이 테스트하며 딱 떨어지는 바삭함을 찾아 헤맸다.
골목을 지나던 나래는 길게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문득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나... 이제 진짜 후카가와 사람 다 됐네.'
언제부턴가 생각조차 일본어로 이어질 때가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혼자 "와, 나 좀 대단한데?" 하고 감탄한 적도 있었다.
그런 변화를 대견하게 생각하는 것도,
유학 온 지 얼마 안 된 스물둘 짜리 여자아이의 순진한 기쁨이었다.
그때, 시야에 눈에 익은 파란색 자동차가 들어왔다. 소에다였다.
그는 요즘 나래의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시간쯤이면 자연스럽게 그녀의 집 앞으로 와 있었다.
그 사실은 마치 누군가가 하루의 끝을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나래를 안심시키곤 했다.
조심조심 차로 다가가 유리창을 두드리자, 소에다가 천천히 눈을 뜨고 나래를 향해 미소 지었다.
차 안에서는 조용한 클래식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그 음악이 소에다의 분위기와 묘하게 잘 어울렸다.
소에다는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기다렸어요? 오늘 아르바이트가 너무나 힘들었어요."
나래는 그의 손을 잡으며 응석처럼 말했다. 손끝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고,
그 온기는 빠르게 나래의 지친 하루를 녹여냈다.
"며칠 전엔 반신욕 하다 잠들었다니까요."
소에다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정말? 괜찮았어?"
"네. 근데 진짜 무서웠어요. 허리까지만 물 받아 놓고 잠깐 눈 감았는데...
정신 차리니까 머리까지 다 잠겼더라고요. 그 뒤로는 물 많이 못 받아요.
혹시 욕조에서 잠들다가 죽는 사람도 있겠다 싶어서."
그 말에 소에다는 걱정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럼 앞으로 반신욕 할 때 나랑 전화라도 할래? 맘 놓게."
"아, 선생님... 그건 더 이상하잖아요."
나래는 피식 웃었지만, 그의 말 한마디가 마음을 조용히 붙잡아주는 듯했다.
나래가 소에다의 어깨에 기대며 조용히 말했다.
"내일... 학교 축제 시작인 거 아시죠?"
소에다는 나래의 얼굴을 살며시 감싸며 천천히 말했다.
"무리하지 마. 힘들면 바로 연락해. 내가 부침개 전부 사줄게."
"말만 들어도 든든한데요? 내일 시간 되면 꼭 오세요."
나래는 그의 입술에 짧게 입맞춤을 남겼다.
차에서 내리며, 방금까지 머물렀던 따뜻한 숨결이 바람에 흩어지기 전에 재빨리 몸을 웅크렸다.
학교에 들어서자 곳곳에 이미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캠퍼스를 스칠 때마다, 학생들이 움직이는 소리와 웃음이 더 또렷하게 들렸다.
축제 준비로 들뜬 분위기가 학교 전체에 퍼져 있었다.
나래가 천막에 다가가자, 제미 친구들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테이블 위에는 재료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휴대용 가스레인지도 3개나 세팅이 되어 있었다.
천막 앞엔 어젯밤 나래가 일본어로 정성스럽게 써둔 간판이 걸려 있었다.
지지미(チヂミ) — 한국식 오코노미야키
야채 부침개 / 해물김치 부침개 200엔
딱히 잘 꾸민 간판도 아니었는데, 그 글씨를 보자 나래는 괜히 배가 간질거렸다.
'와... 이제 진짜 축제다.'
후카가와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래의 하루는 다시 활기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추입니다.
가을 끝자락이 오면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감정들이 문득 고개를 듭니다.
흩날리는 낙엽처럼, 저도 어딘가 흔들리는 기분이 들곤 해요.
오늘은 문득, "나는 왜 이렇게 매일 버티며 살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쳤습니다.
아마도... 조용히 마음이 지치는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치맥 한잔했어요.
말없이 같은 공간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가벼워지는 마음이 있더라고요.
결국, 만추의 밤은 우울 대신 살만 찌우고 끝난 하루였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작가의 말을 적으며 마음을 다독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