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침개가 지글거리는 소리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57화

by 파랑몽상

마지막 가을을 아쉬워하다

날씨는 차가웠지만 해가 유난히 따뜻한 날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다이세츠산은 하얀 눈이 산의 절반을 뒤덮은 채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었다.

곧 있으면 나래가 처음 후카가와에 도착한 날과 마찬가지로 하얀 눈이 도시 전체를 뒤덮을 것이다.

어쩌면 이 축제는 마지막 가을을 아쉬워하는 축제이자 다가오는 겨울을 반기는 축제일지도 모른다.

"어서 오세요! 한국 유학생이 직접 만든 지지미는 여기서 팔고 있습니다!"

여자보다 더 예쁘게 생긴 마사가 여장을 하고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대학교 운동장은 축제 분위기로 물씬 뒤덮여 있었다.

대학교 농장에서 수확한 배추와 무를 판매하는 곳, 쌀을 판매하는 곳,

팥과 대두를 판매하는 부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다른 제미에서는 오코노미야키, 닭꼬치, 닭튀김을 팔고 있었다.

하지만 나래의 제미가 만들고 있는 부침개의 냄새를 당해낼 곳은 없었다.

나래는 식용유에 들기름을 섞어서 대학교 전체에 고소한 향기를 퍼뜨리며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지글거리는 소리

"여기가 한국 유학생이 팔고 있는 지지미 맞죠?"

후카가와 시민들 중에도 나래가 부침개를 팔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 이쪽입니다. 여기로 줄을 서 주세요."

나래는 앞치마를 두르고 정신없이 부침개를 만들고 있었다. 손목이 아플 정도로 반죽을 저어대고 있었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 절로 힘이 났다.

프라이팬 위에서 반죽이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가고 있었다.

그 소리가 나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경쾌한 음악처럼 들렸다.

"마사! 이제 그만 호객 행위 해도 될 것 같아. 재료가 부족할 것 같아."

마사는 뒤돌아보며 말했다.

"나래! 약한 소리 그만해. 돈은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한다고! 재료는 다른 애들한테 사 오라고 하고, 나래랑 슌스케는 열심히 부치면 되지. 안 그래?"

마사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돈독이 오른 사람처럼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앉을자리도 없어서 서서 부침개를 먹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브런치 57화 이미지.png

"마요네즈에 간장을 부어서 만든 소스가 간단하면서도 너무 맛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일본식으로 나래가 만든 소스에 김치전과 야채 전을 찍어서 맛있게 먹었다.

한 장에 200엔짜리 부침개는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나래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생각했다. 이 정도로 장사가 잘되면 홋카이도에 부침개 전문점을 내는 것도 꿈이 아닐 것 같았다.

"마사!! 돈도 좋지만 이렇게 하다가는 우리 쉴 틈도 없이 힘들어서 어떻게 오후 5시까지 버티겠어?"

나래의 투정에도 마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른 친구들에게 재료 구입을 부탁하고 있었다.

"부학장님!!"

어느새 부학장님도 줄을 서 계셨다.

"나래가 만드는 부침개인데 내가 꼭 먹어봐야지. 나는 김치전이랑 야채 전 하나씩 먹어볼게."

멋쩍은 듯 부학장님이 웃으면서 주문을 했다.

한국에서 유학 온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래는 이곳 시민들과 교직원들 그리고 학생들에게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나래는 그런 관심이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함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자신이, 여기서는 '한국에서 유학 온 나래'가 되어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벅차올랐다.


파란 자동차

오후 4시가 되자 날씨가 조금 더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고 바람도 조금 더 차가운 기세를 몰고 왔다.

사람들의 발걸음도 점점 줄어들고, 나래도 계속된 긴장감 때문인지 어깨와 목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손목은 아팠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그때, 바로 그때 파란색 자동차가 학교 주차장에 멈춰 섰다.

소에다는 진료가 잠깐 빈 틈을 타서 나래를 응원하러 온 것이다.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앞치마에 잔뜩 밀가루를 묻히고 웃으면서 부침개를 부치고 있는 나래의 모습이 보였다.

나래는 지금 이 순간이 하루 종일 기다려왔던 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바쁘게 부침개를 부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계속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소에다는 병원을 나오려던 참에 로비에서 미나코와 마주쳤다.

미나코는 나래가 축제에서 부침개를 판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같이 가도 괜찮을까요?" 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소에다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차 안에 들어서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건 미나코였다.

"선생님, 그렇게 불편해하실 필요 없어요. 저... 나래와 선생님,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으니까요."

소에다는 미나코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미나코가 고백했을 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그날 눈물을 보이던 미나코의 모습이 문득 소에다의 머릿속을 스쳤다.


학교에 도착하자 소에다는 창밖을 바라보며 나래의 모습을 찾았다.

"나래!"

미나코가 먼저 멀리 있는 나래에게 손을 흔들면서 인사를 했다.

"여기야 여기! 미나코 짱!"

나래도 펄쩍펄쩍 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나래의 얼굴에는 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와!! 나래, 남자친구가 온 거야?"

마사가 소에다를 발견하고 나래에게 물었다.

"응! 소에다 선생님이 오셨어."

나래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잘 구워진 부침개를 뒤집었다. 이상하게 지금까지 만든 부침개 중에서 가장 예쁘게 구워지는 것 같았다.


사랑의 힘

소에다는 얼굴이 불그스레 진 나래에게 다가갔다. 나래는 밝게 웃으면서 소에다에게 인사를 했다. 제미 친구들은 부침개를 만들다 말고 다들 나래 근처로 모여들었다.

"오이오이~~~ 제군들!! 뭐 하는 거지? 부침개를 만들어야지!"

나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들키기 싫어서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손님도 별로 없고... 나래 남자친구가 왔으니 구경해야지."

슌스케가 놀리듯이 말을 했다.

소에다는 나래 가까이 다가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힘들었지?"

그러면서 어깨에 팔을 둘렀다. 순간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소리쳤다.

"와~!! 남자 같은 나래의 얼굴이 붉어졌어. 이게 사랑의 힘인가?"

이 말에 나래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부끄러우면서도 행복했다.

"그럼 소개할게. 여기는 중앙병원 원장님 처제이자 복지관 부관장님이신 오다가와 미나코 씨, 그리고 남성분은 안과 선생님인 소에다 쇼이치 씨야."

소개를 마치자 다들 우렁찬 박수를 쳤다.

"그럼 오늘은 제가 여러분께 부침개를 사드릴 테니 앉아서 드세요. 나래! 내가 사드려도 괜찮은 거지?"

소에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같은 제미 7명의 남자아이들은 다들 착석하기 바빴다.

나래는 남아 있는 반죽을 이용해서 정성스럽게 부침개를 부쳐냈다. 소에다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더욱 정성을 들였다.

소에다의 눈에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나래의 모습이 더없이 소중해 보였다. 겉으로는 항상 밝고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혼자 견뎌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래는 소에다의 따뜻한 시선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선 안에는 '무엇을 하든 내가 옆에 있어'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손목의 아픔도, 어깨의 뻐근함도 모두 잊혔다. 그가 지금 여기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와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래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었다.


3만 엔의 기적

오후 5시에 모든 축제가 끝나고 나래의 제미는 교실로 들어가서 정산을 했다. 장을 본 금액을 제하고 오늘 판매 금액을 보니 순이익이 3만 엔 정도였다. 200엔짜리 부침개를 부쳐서 하루 만에 만들어낸 놀라운 성과였다.

"오늘은 시로키야에 가서 뒤풀이를 하자. 나래! 오늘 정말 수고했어!!"

기노시타 교수님의 말씀에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그럼 다들 6시 30분까지 시로키야에서 만나는 걸로 하겠습니다."

제미 전체가 다 같이 먹는 술자리는 처음이다. 나래는 소에다와 미나코에게도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정말 괜찮을까? 우리가 끼어도?"

소에다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나래는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오늘 이렇게 응원하러 와줬는데 당연히 함께 가셔야죠."

나래의 목소리에는 오늘 하루를 무사히 마친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첫 축제의 성공적인 마무리와 함께, 나래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설렘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홋카이도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중심에 소에다가 있다는 것이 나래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나래는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뒷정리를 마무리했다.


작가의 말

첫 축제를 마쳤던 순간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한국에서 온 학생이 얼마나 맛있는 걸 만들까, 다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았죠.

그 시선들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어쩐지 따뜻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유학했던 2000년에는 '한류'라는 단어조차 생기기 전이었고, 후카가와는 더더욱 조용한 시골 마을이라 한국 사람이 쌀밥을 먹는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분들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한국식 오코노미야키'를 판다고 했을 때 얼마나 신선하게 느껴졌을까요.

이제 일본 어디를 가도 '지지미'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당연하다는 듯 메뉴판 한편에 자리하고 있죠.

세상이 이렇게 변한 걸 보면, 아... 나도 늙었구나,이런 생각이 듭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축제 전야, 반신욕 하다 잠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