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남겨진 마음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60

by 파랑몽상

문 앞에서의 고민

평소 같았으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벨을 눌렀을 것이다.

하지만 소에다는 나래의 집 앞에서 벌써 10분째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나가는 열차 소리만 묵묵히 듣고 있었다.

「... 나도 오빠가 보고 싶어.」

그 말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통화하는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나래의 얼굴.

손에 들린 숙취해소제 봉지가 바스락거렸다. 소에다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저 술에 취해 무심코 내뱉은 말일 수도 있는데...'

스스로를 달래려 했지만, 자꾸만 그 말을 곱씹게 되는 건

아마도 나래에 대한 마음이 생각보다 훨씬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오해 하나에도 마음이 요동치고 아파오는 자신을 보며,

소에다는 이미 되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고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사랑하고 있었다.

문고리에 숙취해소제를 조심스럽게 걸고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

나래의 얼굴을 보면 그녀를 품에 안고,

온전히 자신만의 여인임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과연 나래의 마음속에는 자신밖에 없을까? 아니면 여전히 다른 누군가도 함께 머물고 있는 걸까.

소에다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쌀쌀한 방 안에서

제법 날씨가 쌀쌀해졌다.

나래는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쌌다.

창문 너머로 베란다의 화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꽃잎들이 선명했는데, 밤사이 내린 서리에 축 늘어져 있었다.

"방 안으로 들여놓을걸... 한순간 방심한 사이에 다 죽어버렸네."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가, 문득 또 다른 생각이 스쳤다.

'곧 눈이 오겠구나.'

올해 4월, 홋카이도 땅을 처음 밟았을 때가 떠올랐다.

자신의 키보다 높이 쌓인 눈더미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던 그때.

이제 11월이 되면 그런 풍경이 다시 펼쳐질 것이다.

그때는 설렘이었는데, 지금은 왠지 막막하기만 했다.

나래는 몸을 뒤척이며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소에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던 순간을.

오해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왜 하필 그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안드레아라도 있었다면 이런 답답함을 털어놓을 텐데,

그녀는 향수병으로 캐나다에 돌아간 상태였다.


작은 발견들

나래는 심한 갈증을 느끼며 냉장고로 향했다.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시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윽..."

화장실로 달려가며 나래는 생각했다. 이런 기분, 예전에도 분명 있었는데.

그때 소에다가 죽을 끓여주고, 숙취해소제를 사다 주고, 하루 종일 옆에서 돌봐줬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화장실에서 나와 거실을 어슬렁거리다가 나래는 멈칫했다.

소파 쿠션 사이에 뭔가 끼어 있었다. 손을 넣어보니 소에다가 쓰던 볼펜이었다.

지난주 함께 영화를 보면서 떨어뜨린 것 같았다.

볼펜을 손에 쥐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식탁으로 시선을 돌리자 소에다가 저번 주 하코다테 출장에서 사다준

과자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반쯤 비어있는 상자를 보며 나래는 깨달았다.

자신이 홋카이도에서 혼자 잘 살 수 있었던 건 독립적인 성격 때문이 아니었다.

모든 순간순간 그의 다정함이 곁을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기에 걸렸을 때, 숙취에 시달릴 때, 외로울 때.

수요일마다 삿포로와 후카가와, 아사히카와의 맛집들을 함께 찾아다니며 만들어진 추억들.

그런데 지금은 그 자상한 소에다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의 깨달음

처음에는 참으려 했다.

하지만 소에다의 볼펜을 꽉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지면서

결국 "엉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그리고 분명해졌다. 소에다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나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여전히 82로 시작하는 국제 전화 부재중 전화 알림이 떠 있었다.

예전에는 그의 전화가 오면 반가웠다.

한국에서의 추억들, 짝사랑을 오래 했던 만큼 그를 많이 그리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래는 부재중 전화 알림을 지웠다. 그리고 연락처 목록을 스크롤했다.

화면에 '소에다 쇼이치'라는 이름이 보였다.

단축번호 1번이었다.

홋카이도에서 핸드폰을 만든 그날 이후로 그는 단축번호 1번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슈퍼맨처럼 달려와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감기에 걸렸을 때, 갑자기 외로워질 때, 어딘가 가고 싶을 때,

그때마다 번호 1번을 누르면 따뜻한 목소리로 "괜찮아?"라고 묻던 소에다.

'처음부터 그 사람이었구나.'

나래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자신이 언제부터 소에다에게 의존하고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의존이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한국에서 이루진 못한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보다 , 홋카이도에서의 현재가 더 소중해진 것이다.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브런치 60-1화 이미지.png

아침 햇살

아침 햇살 창문 틈으로 스며든 아침 햇살이 나래의 볼을 간지럽혔다.

나래는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 떠 있는 '소에다 쇼이치'라는 이름을 보자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정말 바보 같았네...'

망설임 없이 단축 번호 1번을 눌렀다.

신호음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작가의 말

엄마에게 초등학교 6학년 때 했던 말이 가끔씩 기억이 납니다.

"엄마, 난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고, 다 먹고 싶어."

라고 말하니 엄마가 웃으면서 말했죠.

"우리 딸은 좋겠다. 먹고 싶은 게 많아서."

저는 다시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는 먹고 싶은 것 있어?"

그러자 엄마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엄마는 없어. 나이를 먹어서 없나 봐."

지금 제 나이가 딱 그때의 엄마 나이인 듯합니다.

저도... 그때의 엄마만큼이나, 지금은 딱히 먹고 싶은 게 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네요.

식욕과 나이는 반비례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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