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그녀, 이나래-61화
신호음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그러나 소에다의 목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았다.
그저 음성 메시지를 남겨달라는 멘트만 흘러나왔다.
나래는 전화를 끊었다.
‘역시… 내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은가 봐.’
나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바보… 바보…”
과거에만 집착하는 자신이 한없이 한심했다.
나래는 숙취도 깰 겸 창문을 활짝 열고 베란다로 나갔다.
폐 깊숙한 곳까지 칼날 같은 공기가 밀려들었다.
가슴이 시릴 만큼 차가워지면서 정신이 조금 또렷해졌다.
그러나 이내 발끝이 얼얼해지기 시작했다.
베란다에 오래 서 있을 수가 없어 서둘러 실내로 들어왔다.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쉽게 얼어붙을까.
나래는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방을 챙기는 손이 유난히 무거웠다.
오늘은 전공 수업이 있어서 결석을 하면 안 되는 날이었다.
“이런 날 하루 쉬면 좋은데…”
냉장고에서 물 한 통을 꺼내 꿀꺽꿀꺽 마셨다.
하지만 갈증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목구멍은 사막처럼 타들어갔고, 마음도 그랬다.
나래는 반쯤 뜬 눈으로 힘겹게 현관문을 열었다.
그 순간, 문고리에 걸린 비닐봉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봉지 안을 들여다보니 숙취해소제와 이온음료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작은 메모 하나.
「몸은 괜찮아? 이것 마시고 학교에 가
소에다」
짧고 건조한 문장이었다.
글자 하나하나가 날을 세운 것처럼 차갑게 읽혔다.
하지만 화가 났을 텐데도
아침 일찍 이곳까지 와서 숙취해소제를 걸어두고 간
그 마음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래는 차가워진 숙취해소제를 손에 꼭 쥐었다.
손끝으로 그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입 안으로 털어 넣고,
이온음료도 몇 모금에 비워 버렸다.
나래는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숙취해소제 고마워요.
제가 오늘 선생님 만나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 언제가 괜찮으신지 문자 주세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니 은근 걱정이 밀려왔다.
답장이 올까?
아니면 이것마저 무시할까.
“나래, 어제 술 많이 마셨다면서? 괜찮아?”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마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응, 괜찮아. 고마워.”
나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나래가 술을 계속 마시니까 남자친구분 얼굴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거든.
둘이 집에 가는 길에 싸울까 봐 내가 다 걱정했다니까…”
“마사! 누나는 아직도 알코올에 점령당해서 정신이 없거든.
지금 내가 무슨 정신으로 여기 앉아 있는지도 모를 정도야.
그리고 네가 어른들의 사랑을 어떻게 알겠냐…?”
나래가 마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얼른 수업이나 듣자.”
마사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쿨하게 말했지만,
어제 드문드문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오히려 그게 더 걱정되기 시작했다.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교수님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세상에 눈꺼풀의 무게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하더니,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개가 자꾸 아래로 떨어지고
눈꺼풀은 들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래는 제일 먼저 휴대폰 화면부터 확인했다.
문자가 왜 안 오지?
나래의 바람과는 달리
소에다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점심시간에도, 오후 수업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래는 점점 초조해졌다.
혹시 정말 내가 너무 상처를 준 걸까.
숙취에서 서서히 벗어나면서
어제의 기억들도 점점 선명하게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왜…
소에다 앞에서 준철 오빠가 보고 싶다는 말을 했을까.
소에다는 오늘 수술이 네 건이나 잡혀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외래 진료까지 이어져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일반 진료와 수술이 섞여 있어서
휴대폰을 확인할 틈조차 없었다.
나래는 내가 문에 걸어 두고 온 숙취해소제를 먹었을까.
소에다는 나래의 상태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렇게 걱정이 될 줄 알았다면
그냥 과감히 벨을 누르고,
직접 숙취해소제를 먹이고 나오는 건데.
내가 정말 사랑하는 여자인데…
그녀가 힘들게 하루를 보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과거에 짝사랑했던 남자에게
단지 ‘보고 싶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자신이 그 말에 너무 과하게 집착하는 건 아닐까.
너무 소인배처럼 행동한 건 아닐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휴대폰을 확인한 것은
저녁 10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선생님, 숙취해소제 고마워요.
제가 오늘 선생님 만나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 언제가 괜찮으신지 문자 주세요」
소에다는 시간을 보았다.
“벌써 10시네…
나래가 11시에 아르바이트가 끝나니까,
아르바이트 끝나고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할까.”
잠시 망설였다.
어젯밤 나래의 집 앞에서 느꼈던
복잡한 감정들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도, 그녀가 괜찮은지
아픈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래의 진심이 무엇인지도
이제는 분명히 알고 싶었다.
「미안. 이제야 문자 확인했어.
오늘 저녁에 아르바이트 끝나고
잠시 우리 집으로 올 수 있을까?」
소에다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조용히 마시기 시작했다.
나래는 쯔보하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틈만 나면 휴대폰만 들여다봤다.
“나짱! 오늘 왜 자꾸 휴대폰만 보는 거야? 무슨 일 있어?”
점장님이 나래를 보고 잔소리를 했다.
“아, 죄송해요!”
“남자친구랑 싸우기라도 했어?
일할 땐 집중해야지.”
사토가 놀리듯 말을 보탰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접시를 나르다 부딪칠 뻔했고,
주문을 잘못 받기도 했다.
소에다에게서 아무 연락이 오지 않자
심장이 서서히 조여드는 것 같았다.
그때,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미안. 이제야 문자 확인했어.
오늘 저녁에 아르바이트 끝나고
잠시 우리 집으로 올 수 있을까?」
소에다에게서 온 문자였다.
나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르바이트가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시간이 유난히 더디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불안감이 밀려왔다.
오늘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어떻게 사과해야 할까.
소에다가 나의 말을 믿어 줄까.
밤 11시, 아르바이트가 끝나자마자
나래는 급히 소에다의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왔다.
머리는 아찔하게 맑아졌고,
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소에다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을 때,
나래의 손끝은 얼어붙은 듯 떨렸다.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히며
문 앞에서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나의 마음을 전달해야지.
그리고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겠다고 말할 거야.
현관문 앞에 서서
벨을 누르려던 나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벨을 눌렀다.
초인종 소리가
나래의 심장 쪽으로 곧장 박혀 들어오는 것 같았다.
점점 소설을 쓰는 일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내 유학 시절의 추억을 바탕으로 쓰고 있지만 이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도 재미있게 다가갈까?'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이런 고민도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래가 소에다의 집 앞에서 떨리는 손으로 벨을 누르듯,
저도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도 발행 버튼을 누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