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와 진심의 온도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62화

by 파랑몽상

나래의 손끝에 닿은 차가운 초인종. 그 너머, 홋카이도의 밤은 스모키 한 위스키 향과 재즈 선율 속에서

두 사람의 가장 깊은 진심을 기다리고 있었다. 감정의 고백 끝에 마침내 하나가 된 나래와 선생님.

이들의 사랑은 이제 홋카이도의 눈처럼 단단하게 쌓여간다.


깊어가는 밤, 고독의 미학

집에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으니, 시간은 밤 10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친 나래가 도착할 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남아 있다.

소에다는 거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나래를 만난 지 이제 3개월 남짓이 지났네.'

그녀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더는 고독하지 않았다.

나래는 어느새 소에다의 일상 속에서 가장 선명한 좌표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발소리를 기다리는 밤은, 이상하리만큼 길고도 달콤한 형벌처럼 느껴졌다.

소에다는 조니워커 블루라벨을 글라스에 천천히 따랐다.

황금빛 액체가 잔에 쏟아지며, 드라이 스모크와 숙성된 오크의 묵직한 향이 방 안의 정적을 깨고 은은하게 번졌다.

그 향은 마치 오랜 시간 덮어두었던 책장의 모서리처럼, 잊고 있던 감정의 흔적들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게 했다.

투명한 얼음을 넣자 희미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한 모금 마신 위스키는 목을 타고 내려가며 헤이즐넛과 다크초콜릿의 잔향을 남겼다.

그 짧은 미각의 순간, 하루의 고단함이 해체되는 듯했다.

소에다는 소파에 기대어 빌 에반스의 'Never Let Me Go'를 아주 낮게 틀었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홋카이도의 차가운 공기를 감싸고, 위스키의 짙은 향과 함께 마음속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익숙한 안정감 속에서, 그는 잠깐 잠이 들었다.


문 앞에서 멈춘 용기

그 시각, 나래는 소에다의 현관문 앞에서 서성였다.

초인종 위에 손을 얹었지만, 쉽사리 누를 수 없었다.

숙취는 사라졌지만, 아르바이트로 지친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뺨.

주머니에서 립밤을 꺼내 바르고, 마음속으로 수백 번 외쳤던 고백을 되뇌며 심호흡을 했다.

"띵동. 띵동."

첫 벨 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용기를 내어, 이번에는 처음보다 힘을 주어 벨을 눌렀다.

소에다는 두 번째 벨 소리에 화들짝 눈을 떴다.

피아노와 위스키 사이에서 잠시 잊고 있던 '기다림'이 선명하게 돌아왔다.

'나래가 왔다.'

그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훑어볼 새도 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드디어 마주한 진실의 눈빛

"어서 와, 나래. 기다렸어."

멋쩍은 듯 따뜻하게 웃는 소에다의 모습에, 나래는 수줍으면서도 안심되는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많이 기다리셨죠? 너무 늦어서... 오늘은 그냥 돌아갈까 했어요.

선생님도 굉장히 피곤해 보이세요."

나래는 그의 얼굴에서 짙은 피로를 읽어냈다.

어쩐지 자신이 그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함과 자책감이 스쳤다.

"아니야, 나래. 잠깐 눈을 붙였더니 괜찮아. 나보다도 나래가 더 걱정이야. 오늘 하루, 정말 괜찮았어?"

그녀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렇게 서 있지 말고 들어와."

소에다는 문을 활짝 열고 나래의 손을 가볍게 잡아끌었다.

그의 손은 늘 그랬듯이 따뜻했다.

그 손에 이끌려 들어선 집 안은 언제나처럼 은은한 나무와 짙은 위스키의 향이 뒤섞인,

그녀에게 가장 편안한 공간이었다.


불안한 침묵, 준비된 고백

나래는 소파에 조심히 앉았다.

소에다는 부엌으로 잔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나래도 한 모금 마실래?"

나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어제 마신 술이 아직도 위에 가득 남아있는 느낌이에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선생님께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그 말에 소에다는 잔을 꺼내려던 손길을 멈칫했다.

나래의 진지한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불안한 정적 속에서 다시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조니워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나래는 그 불편한 침묵을 깼다.

"선생님이 두고 가신 숙취해소제... 정말 고마웠어요."

소에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화제를 돌리려 했다.

"피곤하지 않아? 뭔가 마실까?"

그는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오렌지주스 있으면... 주실 수 있어요?"

나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소에다는 투명한 긴 유리컵에 오렌지주스를 따르며 조용히 고백했다.

"오늘 하루 종일 걱정했어. 자존심 때문에... 직접 챙겨주지 못한 게 후회가 되더라고.

남자라는 동물은 참... 쓸데없는 곳에 자존심을 세우는 것 같아."

나래는 그가 건넨 주스 컵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에다의 까다로우면서도 맑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에게 닿기까지

"선생님... 어제 일은 정말 죄송해요. 사실 준철 오빠는..."

나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전에 한번 말씀드린 적 있죠? 제 첫사랑이었어요. 2년 동안 혼자 좋아했어요.

그때는 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래의 목소리가 떨리면서도 굳건했다.

"그 사람에게 저는 항상... 뒷전이었어요."

소에다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일본에 온 뒤로도 가끔 술에 취해 전화가 왔을 때, 솔직히 저는... 그게 싫지 않았나 봐요."

나래가 고개를 들어 소에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고, 그 반짝임은 결단이었다.

"하지만 어제, 술에 취해서 저에게 전화를 한 준철 오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확실히 깨달았어요."

나래가 잠시 망설이다가, 지금까지 했던 어떤 고백보다 또렷하게 말했다.

"저는 선생님을 좋아해요. 아니..."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사랑해요, 소에다쇼이치 선생님을요."

소에다의 숨이 잠시 멈췄다.

방 안을 감싸던 재즈 선율이 일순간 멎은 듯했다.

"다시는 어제 같은 일은 없을 거예요. 약속해요."


마침내, 온기 속으로

나래는 부끄러움과 후련함이 뒤섞인 감정으로 오렌지주스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소에다를 다시 바라보았다.

소에다는 오랫동안 그녀의 눈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나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손끝에는 서툰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힘주어 나래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헉..."

나래는 작은 소리를 내며 그의 품에 안겼다.

그의 단단한 심장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또렷하게 울렸다.

"나는..."

소에다의 목소리가 낮게, 떨리듯 울렸다.

"두 번 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 이미 충분히... 아파봤으니까."

그의 품이 더욱 단단해졌다.

나래는 소에다의 품에서 두근거림과 안정감을 느꼈다.

안도감에 길고 긴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5월에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선생님 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나래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소에다는 나래의 얼굴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도톰하고 부드러운 입술에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신을 담아 입을 맞췄다.

나래는 소에다의 입술에서 미세한 오크 향을 느꼈다.

마치 오랜 세월을 견뎌낸 홋카이도 숲 속의 나무 같은 향기였다.

그녀는 그의 목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소에다의 입술에서 천천히 물러났던 나래는, 그 순간 다시 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엔 그녀가 먼저, 아주 작게... 입술을 맞췄다.

소에다는 나래의 입맞춤 속에서, 이 여자가 완전히 자신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제 어떤 틈도, 어떤 장애물도 둘 사이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ㅂ런치 62화 이미지.png

작가의 말

위스키 한 잔과 재즈 선율.

그 사이에서 나래와 소에다는 마침내 서로에게 온전히 닿았습니다.

나래의 고백이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지, 소에다의 품이 얼마나 따뜻했을지...

이 장면을 쓰면서 저도 함께 떨렸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오는 것 같아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위스키 한 모금의 온도처럼, 천천히 몸속 깊이 스며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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