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이라는 이름의 겨울바람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67

by 파랑몽상

시험이 끝난 오후

시험이 끝난 교정에는 묘한 안도감이 흘렀다.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한자와 문장들이 빠져나가고,

대신 몸이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나래! 시험 잘 봤어?"

같은 과 사회인 코스로 들어온 테라시타 씨가 나래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테라시타 상~~! 외운 건 다 쓴 것 같아요. 테라시타 씨는요?"

나래는 테라시타 씨에게 팔짱을 끼고 천천히 걸어가며 대답했다.

50대 중반의 테라시타 씨는 늘 나래를 귀여워해 주었다.

이국땅에서 낯선 언어와 씨름하는 나래의 모습이 대견해 보였던 모양이다.

"나래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 일본인도 하기 힘든 한자와 단어를 외워서

이렇게 시험을 치르다니... 나는 50살이 넘으니까

영~~~ 공부가 힘들더라고. 제발 C만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테라시타 씨는 손바닥을 합장하며 기도하는 시늉을 했다.

나래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늦가을 캠퍼스에 가볍게 울려 퍼졌다.

그런데 테라시타 씨의 표정이 갑자기 조심스러워졌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한 박자 뜸을 들이더니,

마치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해야 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래... 어제 중앙병원에 진료를 갔는데 간호사들이 나래 얘기를 하는 것 같더라고."

나래는 발걸음을 멈췄다.

"한국인 유학생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

병원에서 소에다 선생님이랑 사귀는 게 소문이 돌고 있는 것 같아."

“정말요? 그게 왜 소문이 도는 거죠?”

나래는 잠깐 숨을 고르고 물었다.
사귀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이렇게 수군거릴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둘은 그저 순수하게, 서로를 좋아해서 만나고 있을 뿐인데.

"잠깐 지나가는 말로 들어서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둘이 동거한다 어쩐다 등등 그런 말을 하더라고."

"동거요?"

나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멀쩡한 자기 집을 두고 왜 동거를 한단 말인가.

다만, 저녁 늦게까지 소에다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런 소문이 도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새벽까지 공부를 하고 그의 집을 나선 날들이 있었고,
그 모습이 야간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던 간호사들에게
몇 번쯤은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해라는 말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순간 소에다의 얼굴이 떠올랐다.

병원에서 간호사들과 다른 직원들의 오해 섞인 시선을 받게 될 그를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나래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소에다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시험 두 과목 클리어! 선생님 혹시 병원에서 이상한 소문 들은 것 있어요?'

답장이 오지 않았다. 아마도 진료 중인 모양이었다.


겨울을 준비하는 길

나래는 테라시타 씨와 주차장까지 함께 걸어갔다.

"나래, 어디를 가나 소문은 있어. 그러니까 항상 사람들이 눈과 입을 조심해."

테라시타 씨가 차 문을 열며 말했다.

"나래나 소에다 선생님이나 후카가와에서는 유명한 사람들이잖아.

특히 소에다 선생님은… 도쿄에서 온 엘리트 의사 집안이라는 얘기도 있고. "

테라시타 씨는 마지막 당부의 말을 마치고 작은 경차에 몸을 실었다.

주차장에 홀로 남겨지니 갑자기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나래는 점퍼의 지퍼를 목까지 올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매일 걸어 다니던 길이 오늘따라 유독 길게 느껴졌다.

나뭇가지에서 잎사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싱그럽게 흘러든 시냇물도 추위를 머금은 듯 무겁고 더디게 흘러갔다.

들꽃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곧 다가올 겨울을 대비한 듯

짚 방한대를 두른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문득 나래는 생각했다.

'소문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그녀가 모르는 사이 어디선가 자신과 소에다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그 사랑이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것.

그것도 사실이 아닌 것들로 포장되어.....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미나코였다.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브런치 이미지 67화.png

작가의 말

올해의 마지막 날, 소중한 원고를 올리며 인사를 전합니다.

올 한 해는 유독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지난 11월 말, 아버님께서 노환으로 입원하신 후 마음 편할 날이 없었거든요.

병원에서는 연명 치료 외에 방법이 없다고 했지만,

"집에 가고 싶다"는 아버지의 간절한 말씀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형제들과 긴 상의 끝에 아버지를 집으로 모셨습니다.

병원에서는 곧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우려 섞인 말씀을 하셨지만,

기적처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신 뒤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셨습니다.

어쩌면 잠시 반짝 좋아지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차가운 병원 천장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시는 것보다,

익숙한 집에서 가족의 온기를 느끼며 편안히 계시는 것이

아버지께는 더 큰 위안이 되지 않을까 믿고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마음이 어지러워 소설에 집중하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온 힘을 다해 기운을 내시는 아버지를 보며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저렇게 힘을 내시는데, 저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싶더라고요.

내년에는 아버지의 의지를 닮아 더 부지런히,

더 열심히 살아보려 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늘 곁에서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이 계셔서 큰 힘이 됩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지키고 싶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