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손수건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68화

by 파랑몽상

KEY 커피숍에서

"나래! 잘 지내고 있지? 지금 혹시 어디야? 학교야?"

"미나코 짱~ 나 지금 오늘 시험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혹시 무슨 일 있어?"

나래는 미나코에게 병원에 진짜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나코가 소에다를 오랜 기간 짝사랑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소문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은 미나코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은 아니고... 오늘 혹시 잠깐만 얼굴 보고 얘기할 수 있을까?"

내일도 시험이라 시간적인 부담은 있었지만, 한 시간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전에 잠깐 얼굴을 마주쳤을 때 했던

'소에다 부모님이 나래에 대해서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라는 말이 떠올랐다.

"한 시간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어디가 좋을까?"

"중심가에 있는 키 커피 알고 있지? 거기서 10분 후에 만나자"

나래는 핸드폰을 끊으면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키 커피숍에는 미나코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나래! 여기야."

상큼한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미나코가 나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언제나처럼 눈부신 하얀 피부에 코럴 색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도도한 검은 머리카락은 오늘따라 윤기가 더 흐르는 느낌이었다.

나래는 미나코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미나코 짱, 이렇게 둘이서 차 마시는 건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

내가 아르바이트에 학교에 다니느라 정신이 없어서."

가방을 옆 의자에 내려놓으며 한탄 아닌 한탄을 내뱉었다.

“나래!”

미나코가 평소와 다른 목소리로 불렀다.

“왜 소에다 선생님 얘기는 쏙 빼놓는 거야?
둘이 요즘 연애하느라 바쁜 것,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나코는 오묘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나래는 순간 당황해 손사래를 쳤다.

"응? 미나코 짱! 그건 무슨 소리야?"

나래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얼버무렸다.

미나코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미나코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나래는 답답한 마음을 식히려 시원한 아이스 초콜릿 라테를 주문했다.

나래는 선뜻 먼저 입을 떼지 못했다.

그저 미나코가 먼저 입을 열어주길 기다렸다.


미나코의 말

"오늘 나래를 보자고 한 건..."

미나코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병원에서 자꾸 소에다와 나래 소문이 돌아서야."

나래는 초콜릿 라테의 휘핑크림을 빨대로 저었다.

진했던 다크 브라운의 초콜릿이 옅은 갈색으로 변해갔다.

미나코의 말이 귀에 들렸지만, 마음속 한편으로는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에다 선생님, 병원에 온 지 벌써 5년 됐지만, 한 번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이번엔 소문이 오래가더라고."

미나코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동거한다고 한다던데..."

나래는 말끝을 흐렸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나 의사들이 소에다 선생님 집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걸 본 모양이야.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 소문이 도는 거고..."

미나코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미나코가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그런 말 신경 쓰지 말라는 거야."

나래는 고개를 들어 미나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원래 다른 사람 말하는 거 좋아해. 특히 일본 사람들은 더 그렇고,

이런 작은 마을 사람들은 더더욱!"

미나코가 나래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소에다 선생님이 요즘처럼 얼굴이 밝아진 것 처음 봐."

미나코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항상 병원에서 마주칠 때 보면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다니셨거든.

사색하는 얼굴로 사람들과 술자리도 잘 안 가고.

그런데 나래가 온 이후로 사람이 달라졌어. 긍정적인 의미로."


응원

미나코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나래에게는 다른 사람을 밝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아."

미나코의 눈빛이 진지했다.

"그런 건 아무나 가지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나래! 지금처럼 선생님께 힘이 되어줘."

미나코가 나래의 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그 순간, 나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커피숍으로 오는 내내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긴장했던 탓일까.
아니면 소에다와 자신의 사랑을 응원해 주는 미나코 앞에서,
잠시라도 나쁜 마음을 품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 서였을까.

아니면… 그저 안도의 눈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래는 미나코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지금, 얼마나 큰 용기를 내고 있는 걸까.

“울지 마…”

미나코가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지금 한창 둘이 행복할 때잖아.
내가 응원해 줄게.”

미나코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소에다 선생님 부모님, 만만치 않은 분들이라고 알고 있어.

전에 소에다 선생님의 결혼을 반대해서 둘이 약혼을 했는데도 파혼을 하게 했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깐... 아마 나래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학생 신분에..... 더더욱 한국 사람이니깐

선생님 부모님의 반대가 엄청 심할 것이라는 것은 각오해야 해. "

미나코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마 소에다 선생님이 따로 말씀할 날이 오겠지만,
나래가 잘 이겨나갔으면 해. 소에다 선생님도, 나래라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을 거야. 그만큼 나래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 거 아닐까?”

손수건에는 노란 민들레 꽃이 그려져 있었다.

민들레 꽃 위에 나래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민들레.

척박한 땅에서도 피어나는 꽃.

바람에 흩날려도 다시 뿌리내리는 꽃.

그 순간,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소에다 선생님'

나래는 화면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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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내 생의 좋은 인연들을 다 써버린 것은 아닐까

인생에서 좋은 인연을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마흔 후반의 길목에서 문득 20대의 저를 돌아봅니다. 유독 마음이 시리고 휘청이던 그 시절의 고비마다, 제 곁에는 늘 약속이라도 한 듯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내 생에 찾아올 귀한 인연들을 그때 모두 만나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경한 마음이 들 만큼, 저는 참 인복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다정한 지혜와 온기가 없었다면 저는 아마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 소설을 읽어주시는 여러분의 삶은 어떤가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참 감사하게도,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 참 많구나." 라고 미소 지을 수 있는 당신이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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