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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ce Jun 07. 2024

가족을 갑작스럽게 잃은 사람이 남은 생을 살아가는 법

순간의 상실과 평생의 잔흔


예전의 나는 불안보다는 회피성향이 두드러지는 사람이었다. 뭔가 큰일이 난 것 같아도 휴대폰을 엎어두면 며칠이고 문제를 외면한 채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인생을 바꾸는 큰 상실을 경험하게 되고부터 불안 성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 상실

5년 전의 나는 사고처럼 가족을 잃었다. 막을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사고라 부르지만, 어떻게든 일어날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 '내가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내가 그곳에 가지 말라고 했더라면' 하는 식의 늦어버린 가정은 마음을 지옥으로 내몰기만 할 뿐 일어난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2. 현실

가족의 죽음 직후 한동안은 자신만의 슬픔에 잠겨있을 겨를이 없는데, 사람 하나가 태어나고 죽는 일은 엄청난 행정처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관공서, 보험사, 통신사, 병원을 지겹도록 드나들며 가족의 존재를 정리해야 한다. 병원, 장례, 제사, 조사에 대한 답례 등 모든 징그러운 금전 처리를 해치우고 나면 비로소 폐허가 드러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초연해지며 이것이 필연적인 이별이라면 어떻게든 견뎌지는구나, 하고 자만하는 순간도 찾아온다. 그러나 몇 년이 더 지나 삶에 여유가 생기면, 그간 외면한 당황스러운 그리움이 닥치는 순간이 온다.


3. 잠시 묻어두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갑작스럽게 잃으면 마음은 쑥대밭이 된다. 함께해 온, 언젠가 함께 하기로 했던 모든 일을 어른스럽게 지워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한 추억이란 평생에 걸쳐 이어져 온 것이라 사실 거의 모든 것이다. 어떤 음식, 어떤 향기, 어떤 음악, 어떤 웃음소리. 외부로부터의 어떤 자극이 내게 그리움을 불러일으킬지 몰라서 늘 긴장하며 다니기도 했다.

장례식장에 방문해 준, 그 시기에 나와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는 귀찮고 어려운 변명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새로 만나게 된 사람들과 가족 얘기를 해야 할 때 어려움이 찾아든다. 에너지가 충분하고 상대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솔직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으면 침묵한다.


4. 불안

이 사건을 겪은 후 나는 어느 정도의 불안과 약간의 강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어떤 연락도 놓칠 수 없고, 며칠에 한 번은 꼭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한지 확인해야 한다. 밤중에 가족 중 어른들과 연락이 닿지 않으면 심장이 빨리 뛰어서 푹 잠들기 어렵다.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를 무시할 수 없다. 가족의 안위와 관련한 어떤 연락일 것만 같아 꼬박 챙겨 받고, 여론조사임을 확인하면 안심한다. 내 돈이든 복지포인트든 사용해 가족에게 종합 건강검진을 받게 한다. 저녁을 잘 챙겨 먹고 침대에서 쉬고 있다는 연락을 받으면 나도 편하게 잠들 수 있다.

내가 겪은 이별을 주제로 심리상담을 길게 받아볼까도 고민했으나, 상담에는 내 모든 무의식을 뒤져 아픈 과거를 내 입으로 얘기해야 하는 두려운 과정이 따른다. 나는 아직도 그것을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대신 그 주변의 문제들만 소심하게 건드리며 단기적 치료를 하고 있을 뿐이다. 정석적인 애도가 정말로 지난한 것이라서 차마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가는 법

오늘 점심시간에는 친한 동료가 휴일에 뜨개질 재료를 사 왔다는 말에, 어린 시절 저희 엄마도 제 원피스를 떠 주셨는데 제가 키가 빨리 자라는 바람에 몇 번 못 입어서 서운해하신 기억이 나요. 말하고는 후회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자라지 않지만 내게 원피스를 떠 줄 엄마도 세상에 없는데 나는 또 왜 괜한 말을 했을까, 잠깐 생각한다. 이런 기억이 수십 개, 수십만 개에 이른다.

그래도 영영 잊히는 것보다는 이렇게 하루에 다섯 번씩 그리워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마음을 달래고 하루하루를 넘기다 보면, 새롭게 알게 되는 멋진 것들이 남은 삶을 채우기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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