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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진 Nov 23. 2024

엄마 2

과거의 엄마

    방을 나와 엄마가 지내는 안방으로 향했다. 안방에 불을 켜자 휑하니 남아있는 커다란 침대가 보였다. 둘이서 자기에는 넉넉하지만 혼자서 자기에는 외로운 크기였다. 엄마는 언젠가 아빠가 들어올 거시다는 말로 버티며 침대를 바꾸지 않았다. 정작 아버지가 들어오는 규칙적인 날에는 아버지는 엄마와 같이 자지 않았다. 아버지는 엄마가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잘 수 없다면서 소파에서 주무시고 새벽에 사라졌다. 하지만 엄마는 아버지에게 같이 자자고 조르거나 하지 않았다.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없는 침대의 공간만큼 어머니가 외로워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방을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화장품 대는 엄청나게 컸지만 엄마가 사용하는 화장품은 몇 개 없었다. 장롱에 있는 옷들도 엄마의 옷들은 별로 없었고 아버지의 옷들로만 그득그득 차 있었다. 유일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엄마였기 때문에 그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너무 부분적이었다. 오히려 아버지의 흔적이 가득 차 있었고 그 흔적들은 마치 어머니의 외로움과 고통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 외로움을 공간이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바람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 그를 슬프면서 화나게 했다. 한참을 이곳저곳 살펴보다가 사진 앨범들이 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누나와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항상 사진을 찍고 남겼다. 사진기에서 휴대전화기로 바뀌어도 굳이 사진들을 인화해 앨범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그와 누나가 어느 정도 머리가 컸을 때 사진 찍기 싫어서 엄마에게 뭐라고 한 적이 많았다. 그때마다 엄마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남는 것이 사진밖에 없어. 그러니까 그냥 찍어!”


    그렇게 쌓아 올렸던 앨범들이 많이도 기록되어 있었다. 엄마는 가끔 그것을 꺼내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앨범은 엄마를 재치 있는 이야기꾼으로 만들었다. 깔깔거리며 이것 좀 봐라, 이때는 이랬었다 하며 보여 주곤 했다. 그도 앨범 대부분을 누나와 함께 봤었다. 쌓여있는 앨범 뒤쪽에 처음 보는 앨범이 있어서 꺼내보았다. 한참 동안 구석에서 열어 보지 않았는지 먼지가 쌓여 있었다. 앨범을 열어보니 엄마의 앨범이었다.

    문득 생각해 보니 항상 엄마는 사진을 찍어주느냐 앨범 사진에 없었던 적이 많았다. 그런 엄마를 위해 있는 앨범인 것처럼 엄마의 사진들이 있었다. 그 사진에서도 그와 그의 누나와 같이 찍은 사진도 섞여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는 이 사진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사진 옆에는 엄마가 적은 듯한 일기나 짧은 글들이 쓰여 있었다. 가장 앞장에는 젊은 남녀가 같이 찍은 사진이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엄마의 젊은 모습이 맞았지만, 옆에 있는 남자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아니었다. 그리고 장수를 넘길 때마다 다른 남자들과 찍었던 사진들이 있었다. 메모가 적혀있는 것도 있었고 적혀있지 않았던 것들도 있었다. 누구와 어디서 만났는지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그녀의 패션은 만났던 사람마다 달랐다. 화사하고 요즘 사람 뒤처지지 않게 옷을 잘 입고 다니는 것이 사진에서도 티가 났다. 최 군은 엄마의 처녀 때의 모습도, 그리고 다른 남자들과 이렇게 많은 사진을 찍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젊은 아버지와 같이 찍은 사진 기점으로 더는 다른 남자의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흑백 사진은 컬러 사진으로 바뀌면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이 나도 앨범을 점점 빠르게 넘겼다. 두 사람의 결혼사진, 누나와 그가 있는 여러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누구랑 찍든 간에 엄마는 항상 웃고 행복해 보였다. 최 군의 기억에는 아버지가 사진을 찍어준 적이 없었다. 누가 찍어줬을까 하는 생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엄마의 사진이 있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녀가 사진을 찍어줄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최 군은 엄마의 과거를 아예 몰랐다.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엄마가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자랐으며 아버지를 어떻게 만났는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한 여자로도, 사람으로도 생각해 본 적 없고 그저 엄마는 엄마였으니까

    앨범에는 엄마가 아닌 한 여성의 삶이 담겨있었다. 그는 왜 엄마라는 세계에 단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것일까. 이미 누나라는 남편이자 딸, 그리고 친구 같은 사람이 있어서 이미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랬던 것일까. 애초에 그는 그것이 자신의 권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식과 부모 관계는 서로 아주 잘 알거나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 그는 이 앨범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엄마를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평소에 어떻게 지내는지, 엄마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누가 지금 엄마가 뭘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평일에는 주로 가게에 있으니 가게 나갔을 것이고, 가게에 없으면 동네 친구를 만났을 것이라고 언제든지 대답할 수 있었다. 일요일에는 절이나 가끔 자식들을 위해 사주를 보러 점집에 가거나 무당에게 가 있을 거라 금방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누구보다 옷을 잘 입은 맵시꾼이었고, 젊은 시절에는 여러 남자를 만나며 누구보다 인기 있는 신여성이었고, 아버지를 만날 때 이후로는 일편단심의 해바라기 같은 사람이었고, 말하지 않았지만, 자식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가 평소에 하는 일상과 행동이 항상 똑같지 않았을 텐데도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그저 엄마가 엄마라고만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와 엄마는 남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야 엄마에 대해서 부랴부랴 찾고 곱씹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반복되던 엄마의 일상. 그 일상에 함께했던 시간 중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엄마의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이 그의 마음을 더 일렁이게 만들었다. 그는 엄마가 했던 행동이 모두 당연한 관습으로 받아들이며 아예 엄마라는 사람은 엄마다워야 한다는 생각 했을지도 모른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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