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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진 Dec 08. 2024

엄마 4

엄마와의 밥상 1

    어디선가 갑자기 찬바람이 들어오나 싶을 정도로 오한이 들었다. 최 군은 엄마를 돕겠다며 냉장고에서 반찬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반찬통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침묵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엄마가 요리하는 소리가 함께 하면서 묘한 화음이 부엌을 서서히 물들어갔다. 따뜻하게 올라오는 김과 된장찌개 냄새가 퍼지면서 부엌은 따뜻해져 갔다. 마치 엄마는 따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를 용서했다는 대답 대신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를 용서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밥이 다 차려지고 최 군과 엄마와 함께 식탁 앞에 앉았다. 언제 이렇게 마지막으로 엄마와 단둘이 밥을 먹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해 내려면 기억해 낼수록 미궁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엄마가 수저를 들기 전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먹자."


    엄마는 한마디 한 뒤에 최 군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제야 그는 기억이 났다. 엄마와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게 고등학교 1학년 이후로 없었다는 것을. 독특하게도 엄마는 다른 부분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밥 먹을 때만큼은 자신만의 이상한 고집을 부렸다. 이 집에 가장이 숟가락을 먼저 드는 것. 아버지가 있는 날에 온 가족이 밥을 먹을 때는 아버지가 수저를 먼저 드는 날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없을 땐 누나가, 그리고 누나도 없을 땐 최 군이 수저를 먼저 들 때까지 엄마는 기다리곤 했다. 지금도 알 수 없는 고집으로 꿋꿋이 최 군을 기다리는 엄마를 보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먼저 수저를 들었다. 그제야 엄마는 흡족하다는 듯이 국을 떠서 입에 넣었다.


    "엄마는 부엌이 좋아?"


    엄마는 최 군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부엌은 엄마만의 공간이었잖아. 아버지는 당연하고 누나도 나도 부엌에서 뭔가 하거나 음식하고 밥하고 하는 거 싫어했었으니까."


    엄마는 최 군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세상천지에 부엌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냥 해야 하는 일이니까, 당연하니까 했지. 너거들 밥도 먹이고 학교도 보내고 그리고 나면 커피 한 잔 하면서 잠깐 쉬다가 또 설거지하고 그게 늘 일상이었지."

    "근데, 왜 아빠는 그렇다 치는데 누나랑 나조차 뭔가 하는 걸 그렇게 싫어했어?"

    "내가 싫어했다고?"

    

    엄마는 최 군에게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냐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지금이 아니면 엄마에게 물어볼 수 없을 것 같아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부엌은 항상 엄마만의 공간이니까. 그래서 나는 엄마가 부엌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

    "사람이 태어나서 자기 좋은 일만 하고 어찌 살겠냐? 좋은 일도 싫은 일도 하니까 사람이지. 속 편한 소리 하고 자빠졌어."


    엄마는 들리지 않은 소리로 구시렁거리다가 양옆을 돌아보더니 이내 최 군에게 다가와 조용하게 말했다.


    "누나도 너도 결혼하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니까 그랬다. 그리고 아빠는 요리 못해서 못 들어오게 한 거고."


    엄마는 입에 검지를 갖다 대며 쉿! 했다. 그러면서 입꼬리가 올라가며 웃으며 이야기를 마저 했다.


    "예전에 누나 낳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나? 그때 너그 아버지가 요리를 해주겠다고 온 주방을 쑤시고 다니는데 세상에 그날따라 유난히 힘이 들어서 아무 소리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웬걸! 찌개에는 설탕을 처넣고 있지를 않나. 고기 먹이겠다고 소금을 얼마나 부었는지 짜서 먹지를 못하겠더라고. 그래도 그때는 차마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없었어. 그래서 입맛 없다고 하고 말았지 머."


    최 군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마 가족들은 다 모를 것이라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으로 엄마는 킥킥 거리며 말했다.


    "첨 하는 얘기다, 혼자만 알고 있어라!"


    최 군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엄마도 그를 따라서 깔깔 웃었다. 이렇게 웃으면서 따뜻한 밥상을 먹은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평소에는 서로 말이 없었던 터라 이런 대화가 가능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최 군은 문득 자신의 어린 시절, 누나와 함께 보냈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집에 돌아와 엄마가 차려주신 저녁을 앉아 먹을 때면 늘 서먹서먹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둘은 한참을 웃다가 순식간에 침묵이 찾아왔다. 엄마는 여전히 국그릇을 앞에 두고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다. 마치 먼 과거의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최 군은 엄마의 눈빛을 보았다. 그 깊은 침묵 속에서 엄마의 눈동자는 어딘가 멀리 떠돌고 있었다. 아마도 지나온 세월의 한 장면들을 다시 주마등처럼 보고 있는 듯했다. 그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엄마의 눈빛 속에는 말하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러더니 엄마는 조용히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고 나서 엄마가 먼저 운을 떼었다.


"그래도 너들 자랄 땐 좋았지. 반찬 투정도 조금 하고 때로는 다 차려준 밥상을 바쁘다고, 지각했다고 안 먹고 가는 경우도 있고. 그랬어도 숟가락과 젓가락이 밥과 반찬 사이로 신나게 움직이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 보는 재미도 있었어. 신기하게도 자라면서 좋아하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싫어하는 걸 어느 순간 잘 먹기도 하고. 잘 먹는 걸 보면 한편으로는 좋은데, 한편으로는 두렵더라. 그래서 밥 차리는 게 아무리 귀찮아서 티 내지 않았고 너거들도 못 들어오게 한 거야. 그게 전부였다."


    엄마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그때 시절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었다. 최 군은 아무 말하지 못했다. 마치 자신의 양심을 누군가 젓가락으로 콕콕 찌르고 휘젓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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