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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진 Dec 21. 2024

엄마 6

엄마와 아버지 1

“엄마.”

    급기야 엄마가 짜증을 냈다.


“왜? 또? 뭐? 아따 그놈 새끼 궁금한 것도 많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

“맘대로, 맘대로. 뭔데?”


    최 군은 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가 바람피우는 거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


    공기가 조용해졌다. 그와 엄마는 한동안 말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아까보다 더 긴 침묵이었다. 그는 괜한 질문을 했나 싶어서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엄마는 무언가를 곱씹으며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막상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 동안 침묵이 공기를 다시 차갑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한마디가 침묵을 깨트렸다.


"국 좀 더 줄까?"


    덤덤하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하고, 단호한 것 같지만 깊은 그런 목소리로 엄마가 물었다. 최 군은 아무 말하지 않고 조용히 끄덕였다.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국그릇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는 척하지 않았다. 엄마는 한 국자 퍼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부엌 창가에서 비쳐오는 해를 바라보면서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러게 두어 번 뜨고 나서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너는…."


    엄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울음이 가득했다.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내뱉는 목소리였다. 마치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아이처럼 그런 건지 아니면 헤어진 연인의 슬픔인 건지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비통함이 담겨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알게 되는 것들이 있지.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 하는 것들."


    그녀는 눈에서 나오는 눈물을 아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손으로 훔친 다음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것들이 인생 사는데 필요한 경우가 있어. 그게 더 편할 때가 있거든."


    엄마는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았다. 최 군은 엄마의 속이 문드러졌다는 생각보다 내부에 이야기가 쌓여있음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끊임없이 반복되던 엄마의 일상은 사소하고 보잘것없을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한 여자의 인생이었다. 그는 말하지 않았도 깨달았다. 한 여자와 사람의 인생을 위해서가 아닌 엄마의 지위로 계속해서 존재하고, 가족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하다고 생각한 관습이 하나하나 쌓여가며 서서히 엄마는 자신의 인생을 조금씩 잃어버려가고 있었다. 엄마는 살짝 붉게 된 눈시울을 훔치면서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말했다.


"얼른 밥이나 묵자."


    그녀의 목소리와 손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밥상 위로 새로 뜬 국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가 천천히 부엌을 다시 채워가고 있었지만, 왠지 아까보다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최 군은 한참 동안 수저를 들지 못했지만 엄마는 앉자마자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엄마가 밥을 한 숟가락 한 숟가락 뜰 때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 덜어내는 듯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지나갔으니 상관없다는 듯이 엄마는 계속해서 밥을 먹었다. 부엌 창문으로 들어오는 노을빛이 식탁을 물들였다. 엄마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주름진 눈가, 파마한 뽀글 머리, 그리고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미소까지. 최 군은 그제야 깨달았다. 엄마도 누군가의 딸이었고, 누군가의 연인이었으며, 한 사람의 여자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뒤로한 채, 그저 '엄마'로 살아왔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모르니까 당연한 거야, 그러니까 밥이나 먹어라. 국 식는다."


최 군은 조용히 수저를 들었다. 식어가는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으며 그는 문득 이해했다. 때로는 모른 척하는 것이 서로를 위한 배려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창가로 스며드는 저녁노을이 식탁 위에 놓인 두 개의 그림자를 길게 늘여놓았다. 둘은 조용히 계속해서 밥을 먹었다. 가끔은 침묵도 위로가 된다는 것을, 그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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