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대화
인간에 대한 기억은 어디까지일까. 최 군이 기억하고 있는 엄마의 기억은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었고 어디까지가 맞고 틀린 건지 복잡했다. 자신이 어떤 아들인지 생각하고, 그렇게 기억 끝에 찾아오는 후회들 때문에 그도 모르게 감겨 있는 알 수 없는 감정과 죄의식에 앨범을 한참 동안 닫지 못하고 엄마의 모습을 쓰다듬었다. 고요한 분위기를 깨는 것은 휴대전화기 벨소리였다.
“여보세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어안이 벙벙해 한참 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다가 문을 열었다. 엄마는 뭐 하고 있느냐면서 담담하게 문을 열어서 집에 들어왔다. 엄마는 자연스럽게 집에 들어왔고 담담하고 뻔뻔했다. 오히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우물쭈물하는 그가 외부인 같았다. 엄마는 태평하게 서울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공부는 열심히 하는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밥이나 먹고 가라면서 식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무슨 상황인지 멍하니 있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 나 물어볼 게 있어.”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데?”
“엄마 안방에 숨겨져 있던 그 앨범은 뭐야?”
엄마는 비실비실 웃으며 뜸을 들였다.
“그러게? 그게 뭘까?”
“그렇게 웃지만 말고 대답해 줘요.”
엄마는 내가 물어보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도 모르게 엄마의 눈동자에서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라는 말, 예전에는 참 싫어하는 말이었는데. 사람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데도 우리는 서로에게 이해를 바라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이 너무 비극적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왜 자기가 느낀 무언가를 전하려고 애쓰는 건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엄마의 눈동자에서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봐버렸구나 하는 눈빛을 보았다.
“그래서 엄마 사진 훔쳐보니까 어떠냐?”
엄마의 말투에는 뭔가 비꼬는 듯하면서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말했다.
“… 그냥, 엄마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된 것 같아.”
엄마는 픽하고 웃으며 그에게 강렬하게 딱 한마디 했다.
그 한마디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의 가슴을 스쳤다. 엄마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부드러운 조롱이자 숨겨온 분노의 한 조각 같았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엄마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고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엄마는 밥을 차리기 위해서 부엌으로 천천히 움직였고, 그는 엄마의 등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엄마의 또 다른 모습, 그 모든 것들이 마치 퍼즐처럼 맞춰져 가고 있었다. 앨범 속 사진들, 엄마의 말들, 그의 기억 속 편린들이 서서히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 시작했다. 엄마는 여전히 밥을 덜어내고 있었고, 그의 시선은 천천히 엄마의 손등에 맺힌 작은 주름살을 따라 미끄러졌다.
"엄마…."
최 군의 목소리는 떨렸다. 이번에는 다른 뉘앙스였다. 날카로움보다는 부드러운 애절함이 묻어났다. 엄마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손에 든 국자를 천천히 움직일 뿐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엄마의 이런 침묵이 때로는 가장 큰 대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의 머릿속에는 방금 전 대화들이 스쳤다. 앨범 속 수많은 남자들의 흔적, 엄마의 과거, 그리고 지금의 엄마. 모든 것들이 얽혀 있었고, 그 얽힘 속에서 그는 엄마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해한다'는 말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위험한 단어인지, 그제야 깨닫고 있었다.
엄마는 밥상을 차리며 여전히 그 가냘픈 웃음을 지었다.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들을, 말하지 못한 비밀들을. 그의 손가락 끝이 떨렸다. 엄마를 향한 감정은 분노였다가 연민이었다가 이해였다가 다시 분노로 돌아왔다.
"엄마."
최 군이 엄마를 불렀을 때 이번에는 마치 용서를 구하는 듯한, 혹은 용서받기를 바라는 듯한 목소리였다. 엄마는 여전히 등을 보이며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저 국자만이 찻접시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고요한 부엌을 가르며 흘러나왔다. 그리고 따뜻하게 피어나는 김이 최 군을 마치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