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사랑해 준다고 했어."
침묵을 깬 엄마의 한 마디는 뻔하면서도 놀라웠다. 로맨틱한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클리셰. 하지만 그녀의 쓴웃음 속에는 지나간 시간의 무게가 묻어났다. 아버지가 그 말을 했을 당시만큼은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 군은 어머니의 표정과 한마디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우리 부모님은 흔히 말하는 얼굴도 모른 채 결혼하지는 않았구나, 서로 사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있었다. 서로를 그토록 사랑했는데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 건지, 그리고 아버지는 왜 바람을 피운 건지. 마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빠진 것처럼 완성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건 누나가 고등학교 2학년, 최 군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 후로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엄마는 집에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누나와 그가 메꿔주려고 했지만 '남편'이라는 반려자의 빈자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분명히 엄마 마음속 한편에는 공허했을지도 모른다. 최 군이 대학을 졸업할 나이가 되어서야 아버지가 간간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더 큰 상처가 되었다. 두 분은 한 집에 있으면서도 마치 남이 된 것처럼 잠자리를 같이하지도 않았고, 시간을 함께 보내지도 않았다. 공기 속에는 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문득 가장 궁금했던 것은 그녀의 바람이었다. 심지어 유일하게 항상 집을 지키던 엄마가 집을 나가면서까지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 군이 아닌 엄마가 처음으로 꺼낸 한마디로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그녀도 '여자'라는 존재로, '지윤'이라는 이름으로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단순히 '누군가의 아내'나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닌,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느 순간부터 엄마를 사랑하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아내라는 한정된 울타리에 가둬두었다. 그렇게 엄마는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정된 존재로 살아가다 결국 터져버린 것이다.
"근데, 고 잡것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네. 그게 전부였던 거야."
엄마는 손끝으로 밥그릇의 테두리를 무의식적으로 쓰다듬으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참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더라. 자기는 여기에 갇혀있고 싶지 않다고."
"그래서 아버지가 집을 나간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엄마는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근데 하나 확실한 건, 나는 너희 아버지가 이해는 안 되지만 불쌍하다."
그랬다. 엄마는 오랫동안 집을 지키면서 누나라는 가장과 함께하며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가장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아버지는 집 밖에 나가 있었지만 돈은 꼬박꼬박 보내왔다. 돈을 가족에게 보내며 죄책감을 덜으려 한 건지, 아니면 가장이라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가장 노릇은 하고 있는지. 뭐 하는지는 몰라도 돈을 항상 벌어서 보내주고, 심지어 돈이 모자란 날에는 어떻게 알았는지 기똥차게 전화해서 돈이 필요하냐고 물어보고. 그래서 참고 있었지…."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어요?"
엄마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식어가는 밥그릇을 맴돌았고, 마침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 군의 빈 그릇까지 조심스럽게 쌓아 들고 부엌으로 향하는 엄마의 뒷모습에는 말하지 못한 이야기의 무게가 실려있는 듯했다.
"한 번은 너희들이 집에 없을 때, 아빠가 집에 온 적이 있다."
물소리와 함께 엄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들 앞에서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을 그때 처음 꺼냈지. 이혼하자고. 전에는 본인이 그렇게 이혼해 달라고 했을 때 내가 안된다고 했었거든? 근데, 내가 이혼하자니까 안된다고 하더라. 어이가 없어서. 그래서 집을 나갔어."
아버지가 엄마에게 이혼하자고 말한 것은 오늘 처음 안 사실이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설거지가 다 된 그릇을 놓으려다가 그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바닥에 떨어트렸다. 순간적인 정적 속에서 깨진 그릇 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마음으로 지르고 싶었던 울분이 그릇이 깨짐으로써 대신된 것일지도 모른다.
최 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깨진 유리 조각들을 주웠다. 그녀는 여전히 아들을 마주 보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이내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최 군은 누나가 울었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엄마를 안아주었다. 그의 품 안에서 울고 있는 엄마는 그저 한 여자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