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 이 도시의 익명들에게

by 이로

그날은 유난히 어깨가 무거운 날이었다.

노트북 가방은 벽돌이라도 넣은 양 묵직했고, 발걸음은 모래주머니를 단 듯 축축 처졌다.

퇴근길, 지하철 역을 나서면서도 영혼은 아직 회사에 묶여 있는 기분이었다.

뭔가 시원한 거라도 목에 들이붓고 싶어서 홀린 듯 편의점으로 향했다.

차가운 생수 한 통을 손에 쥐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편의점 문을 나서서 터벅터벅 걷는데, 저 멀리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아니, 익숙한 '유형'의 뒷모습. 어깨는 살짝 구부정하고, 걸음걸이에는 미세한 피로감이 묻어났다.

딱 봐도 'K-직장인' 바이브가 뿜어져 나오는 한 여자였다.

어디서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볼 일 없을 그냥 평범한 사람.

나처럼 하루를 겨우 버텨낸 사람이겠지.

내 손에 들린 생수통이 유독 차가웠다.

혼자 마실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그녀를 보니 왠지 모르게 같이 건배를 하고 싶어졌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거 나도 안다.

갑자기 뛰어가서 “저기요, 오늘 고생하셨죠? 같이 물 한 잔 하시죠!”라고 외치면,

백이면 백, 미친 사람 취급하겠지. 괜찮다. 내 마음속 건배니까.

나는 생수통을 살짝 들어 올렸다. 눈앞의 사람에게 건배라도 하려는 듯이.

"저기 걸어가는 모르는 당신을 위해 건배!"

내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지만, 마음은 시원하게 외치고 있었다.

누구냐고 묻는 건 반칙이다. 당연히 모르는 사람이다.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른다.

오늘 하루 뭘 했는지, 어제는 어땠는지, 심지어 몇 시에 퇴근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궁금하지도 않다. 알아봤자 뭐 어쩌겠나.

내 인생도 복잡한데, 남의 인생까지 끌어안을 여유는 없다.

솔직히 나부터 좀 살자, 싶을 때도 많다.

근데 이상하게도 왠지 모르게 그의 어깨에 얹힌 피로가 느껴졌다.

'아, 오늘 하루도 고생했겠구나.' 하는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어쩌면 나보다 더 힘든 하루를 보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나보다 더 엿 같은 일에 부딪혔을 수도 있고.

그래서인지 뜬금없이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힘내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뭐 이런 거창한 응원은 아니고,

그냥 '수고 많으셨어요' 정도의 짧은 위로.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마저 행운을 빌어주는 나, 정말 너무 멋진 인간 아닌가?

가끔 나도 내 이런 오지랖 감성에 좀 놀란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또 누군가를 응원하는 마음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지 않나 싶다.

요즘 세상이 워낙 팍팍해서, 서로에게 뾰족하게 굴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건데 말이다.

솔직히 말해, 내가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내 한 통의 생수와 짧은 마음속 건배가 그 사람의 고단한 하루를 바꿔줄 리는 만무하다.

그녀는 여전히 굽은 어깨로 걸어가고, 나는 여전히 혼자 생수를 마실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이 작은 행위가 나에게는 묘한 위로가 된다.

뭐랄까, '너만 힘든 거 아니야'라는 무언의 연대감 같은 거?

나는 생수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갔다.

저 멀리 여자는 여전히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점점 작아지고, 결국 퇴근 인파 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이 도시의 수많은 익명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뒷모습은 내 마음에 작은 흔적을 남겼다.

이 넓은 도시에서, 우리는 모두 고독한 섬처럼 존재한다.

서로의 삶을 알지 못하고, 알아도 깊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알 수 없는 연대감을 느낄 때가 있다.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이고, 오늘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우리 모두 존버 중'이라는 짠한 공감대.

나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밤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똑같은 출근길을 걸을 테고, 또 다른 ‘모르는 당신’을 스쳐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또다시 속으로 건배를 외칠지도 모른다.

삶은 계속된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그냥 때려치우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허우적거리고,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엉엉 울기도 하면서.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가끔은 이런 작은 위로가 필요하다.

익명의 누군가를 위한 건배.

그리고 그 건배가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순간도 올 것이다.

오늘도,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일을 위해,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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