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아이러니

by 이로

새벽 두 시, 챌린지 성공!

화면에 뜬 알림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던지듯 침대에 내려놨다.

불 켜진 스탠드 아래, 나는 기진맥진한 채로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요즘 유행하는 수면 챌린지였다. 억지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목표인데, 매번 실패였다.

오늘도 자정에 잠들기는 글렀다. 내일 아침 아홉 시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이렇게 또 밤을 새우고 있다니. 이러다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젊음의 향기가 날 때까지만 해도 밤샘은 기본 옵션이었다.

시험 기간에는 이틀 밤낮을 새워도 끄떡없었고,

친구들과 밤새 싸돌아 다니다가도 다음 날 멀쩡하게 수업을 들었다.

그때의 나는 자유 그 자체였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한강 다리를 걷고, 첫차를 타고 집에 돌아와 뻗어 자는 게 일상이었다.


근데 언제부턴가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밤샘은커녕 자정만 넘어도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계단을 오를 때도 괜히 숨이 찼다.

'아, 나도 이제 늙었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이 이젠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젊음이 이런 거였구나.

온몸으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 뭘 해도 지치지 않는 무한한 에너지. 그게 젊음이 주는 특권이었구나. 문득, 한 친구가 농담처럼 던진 말이 떠올랐다.

"야, 우리 늙으면 클럽에서 디스코 춤이나 추고 있을걸? 그때 되면 다리라도 멀쩡해야 할 텐데!"

그때는 낄낄 웃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마냥 웃을 일은 아니었다.


요즘 나의 행복은 소박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베개 옆에 얌전히 놓인 고양이,

따뜻한 물 한 잔,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그리고 마감 기한을 넘기지 않고 겨우 완성한 보고서.

옛날에는 엄청난 성취만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대학에 가고, 대기업에 취직하고,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겪어보니, 그런 거창한 목표들이 채워주는 행복은 잠시뿐이었다.

오히려 하루하루 살아가는 작은 순간들이 주는 평온함이 더 큰 만족감을 주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넷플릭스 보면서 치킨 시켜 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친구 말에 격하게 공감할 때마다, '아, 내가 많이 유해졌구나' 싶다.

예전 같았으면 "야, 그게 행복이냐? 넌 꿈도 없냐?"라고 했을 텐데 말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아졌다.

연인과의 뜨거운 사랑만이 전부인 줄 알았다.

내 모든 것을 바쳐 상대에게 올인하고, 그만큼 돌려받지 못하면 세상 무너질 듯 아파했다.

그런데 이젠 좀 다르다.

부모님이 잔소리처럼 던지는 "밥은 먹었냐?" 한마디에 담긴 걱정,

별말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의 묵묵함, 그리고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가족의 존재.

이런 것들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깨닫는다.

얼마 전 엄마가 아프셨을 때, 병원에서 밤새 간호하며 엄마 손을 잡고 있는데 울컥했다.

항상 옆에 계실 줄 알았던 엄마가 아프니 비로소 그 존재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당연하지 않은 순간에 더 선명하게 빛났다.

젊을 땐 사랑을 좇아 헤매기 바빴는데, 이젠 사랑이 내 주변에 이미 가득했다는 걸 어렴풋이 느낀다.

어쩌면 사랑은 숨바꼭질하는 아이처럼 늘 내 곁에 숨어 있었는데, 내가 못 본 게 아닐까.


거울을 보면 낯선 내가 서 있다.

이마에는 주름이 희미하게 생겼고, 눈 밑 다크서클은 사라질 줄 모른다.

'이게 정말 나라고?' 가끔 믿기지 않을 때도 있다.

젊을 때는 타인의 시선에 갇혀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남들이 좋아하는 옷을 입고, 남들이 원하는 나를 연기했다.

그런데 이제는 좀 달라졌다. 남의 시선보다 내 마음이 편한 게 중요해졌다.

누가 뭐라든 내가 좋으면 그만이다. 혼자 집에서 슬리퍼 신고 돌아다니는 게 세상에서 제일 편하다.

‘나’라는 존재가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될 때,

비로소 나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시작되는 것 같다.

이젠 거울 속 낯선 얼굴을 마주하며 '아, 이게 나구나' 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삶은 참 아이러니하다.

가장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사라지거나 위협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진정한 가치를 깨닫는다.

자유, 행복, 사랑, 그리고 나 자신.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줄 알았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는 순간,

삶의 깊이와 아름다움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건 마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똥별과 같다.

짧지만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들. 나는 그 찰나의 빛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다.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날 수 있을까? 글쎄, 그건 내일의 내가 고민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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