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초반에, 나는 세상을 다 아는 줄 알았다.
특히 말과 행동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고 굳게 믿었다.
유튜브에서 본 논리왕들처럼 칼날 같은 말로 상대를 찍어 누르고,
인스타 피드의 완벽한 사람들처럼 부지런한 행동으로 성과를 증명해 보이는 게 성공의 왕도라 생각했다.
그래서 늘 더 날카로운 말을 찾고, 밤샘하며 효율적인 스케줄을 고민했다.
'갓생'을 살아야만 진짜 '나'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기억은 '느낌'을 먹고 산다
근데 웃긴 게 뭔지 아나?
시간이 흘러 내 인생이라는 책장을 한 장씩 넘겨보니,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건 화려한 언변이나 대단한 행동 그 자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날이 태반이다.
오히려 그때 내가 느꼈던 아련한 온기나 서늘한 감촉, 바로 그 '느낌'들이 더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엄마를 떠올려보면 그렇다.
"공부해라", "밥 먹어라" 하시던 그 많던 잔소리는 그냥 배경음악 같을 뿐이다.
대신, 늦은 밤 피곤에 절어 귀가했을 때, 식탁 위에 무심한듯 놓여 있던 따뜻한 밥상.
그 밥상에서 느껴지던 뭉클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성적 떨어져서 풀이 죽어 있을 때, 아무 말 없이 내 어깨를 토닥여주던 투박한 손길.
그런 사소한 것들이 세월의 먼지를 뚫고 여전히 내 마음을 울린다.
엄마의 말이 아닌, 엄마의 마음이 느껴졌던 순간들.
친구 관계도 마찬가지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말을 주고받았던가.
벤치에 앉아 했던 열띤 토론? 아니면 밈을 공유하며 깔깔거렸던 시시콜콜한 농담?
그런 것들은 그냥 스쳐 지나간다.
내가 진짜 힘들 때, "무슨 일 있냐" 묻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곁을 지켜주던
친구의 든든함이 더 기억에 남는다.
한밤중에 울린 전화를 군말 없이 받아주던 그 목소리의 안도감.
그런 '느낌'들이 모여서 우리의 우정이라는 집을 지었다는 걸 깨달았다.
말과 행동은 음식을 담는 그릇과 같다.
아무리 예쁜 그릇이라도 안에 맛없는 음식이 담겨 있으면 그냥 허기를 채울 뿐이다.
셰프의 정성이 담긴 음식은 허름한 그릇에 담겨 있어도 깊은 맛을 내고, 마음까지 채워준다.
결국 중요한 건 그 그릇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 즉 진심이 담겨 있느냐 아니겠나?
우리는 '느낌'으로 기억된다
결국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남기는 건 그 사람이 했던 말이나 행동의 스펙이 아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느꼈던 감정의 총합이다.
"그 사람 옆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져",
"그 친구를 생각하면 그냥 웃음이 나" 같은 것들 말이다.
이게 바로 한 인간이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진솔하고 강력한 영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라도 조금 다른 것에 집중해 보면 어떨까.
얼마나 논리적으로 옳은 말을 하느냐보다, 내 말이 상대에게 어떤 느낌으로 가 닿을지를 먼저 생각해보는 거다.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느냐보다, 나의 행동이 누군가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남길 수 있을지를 헤아려보는 거다.
가끔 내향인 친구들이 "나는 말도 잘 못하고, 행동도 적극적이지 못해서 문제인 것 같아"라고 자책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말해준다. "야, 너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나한테는 큰 위로야.
네가 건네는 짧은 한마디가 어떤 화려한 위로보다 진심으로 다가올 때도 많아." 실제로 그렇다.
"덕분에 즐거웠어", "함께하니 힘이 나네" 같은 진심 어린 말 한마디.
이게 진짜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날카로운 논리로 이기는 대신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을 얻는 법을 배우는 것.
재빠른 행동으로 앞서가는 대신, 느리지만 함께 걷는 즐거움을 알아가는 것.
솔직히 나도 아직 갈 길이 멀다.
맨날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느라 주변을 못 돌아볼 때가 더 많으니까. 반성한다.
따뜻한 기억으로 데워질 삶
결국 인생의 마지막에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도,
남길 수 있는 것도 대단한 업적이나 통장 잔고가 아닐 것이다.
살면서 주고받았던 수많은 따뜻한 느낌들, 그 기억의 조각들이지 않을까.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할머니가 남긴 재산이나 화려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할머니가 건네주던 따뜻한 인절미, 누구에게나 말없이 손을 잡아주던 그 손의 온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게 진짜 할머니가 남긴 유산이었다.
그러니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기분 좋은 온기로 기억되기를.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그런 따스한 느낌들이 차곡차곡 쌓여, 남은 인생을 든든하게 데워주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