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그리고 나머지

by 이로

퇴근길 지하철, 늘 앉던 그 자리.

창밖 풍경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폰을 멍하니 보다가 문득 옆자리 아저씨의 코 고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곤히 주무시는 모습이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나도 저렇게 편하게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다 느닷없이, 뜬금없이, 인연이라는 단어가 훅 치고 들어왔다.

내가 스물셋, 그러니까 ‘어렸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시절엔, 인연이 곧 필연인 줄 알았다.

한번 맺어진 관계는 무조건 영원해야 한다고.

헤어짐은 실패의 낙인이었다.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려 애썼고, 이유를 찾다 밤을 지새우곤 했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엄청난 행운, 당신이란 이름으로

서른을 코앞에 둔 지금, 나는 관계를 좀 다르게 본다.

짧게 말하면 이렇다. "너와 내가 만난 건 엄청난 행운, 못 만난 건 그럴 수도 있는 일."

이 문장 하나에 내 삶의 꽤 많은 시간과 감정의 파도들이 녹아있다.

겪을 거 다 겪고 나서야 겨우 닿은 평온한 해안가 같은 말.

한번 생각해 볼까.

이 복잡한 세상, 수십억 인구 중에, 헤아릴 수 없는 길 중에, 하필 '당신'과 내가 만났다.

옆에서 코 골며 자는 배우자,

이제는 제 앞가림 알아서 하는 자식들,

달 빛 비치는 창문 열어 놓고 밤새 웃고 울었던 오랜 친구들.

이 만남들이 얼마나 기적 같은 확률인지.

가끔은 '징글징글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때도 있었지만,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지금 나는 대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수많은 '만약' 중 아주 사소한 하나라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우리는 서로를 영원히 모른 채 살았을 거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일상의 찌질한 다툼이나 서운함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사라진다.

그저 이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건'처럼 느껴진다.

이거 완전 대박 사건 아닌가.

이건 비단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삶을 수놓았던 수많은 인연의 조각들.

그 조각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힘들 때 아무 말 없이 따뜻한 밥 한 끼 사주던 직장 동료,

아무것도 모르던 나를 이끌어준 인생 선배,

어쩌다 한번 만났지만 깊은 영감을 준 낯선 사람까지.

이 모든 만남은 우주적 확률을 뚫고 내게 온 엄청난 행운이다.

그러니 우리는 매 순간, 생각보다 훨씬 더 스펙터클한 기적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이쯤 되면 로또보다 더 큰 행운 아닌가 싶다.


그럴 수도 있었을, 숱한 나날들

반대로, "못 만났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는 말은 또 얼마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

여기에는 체념이 아닌, '내려놓음'의 지혜가 담겨 있다.

괜히 어깨에 힘주고 살 필요 없다는, 그런 편안함이랄까.

누구에게나 아쉬운 인연 하나쯤은 마음에 품고 산다.

떠나보낸 첫사랑, 오해로 멀어진 친구, 혹은 더 나은 기회였을지 모를 다른 길.

'그때 그 사람을 잡았더라면', '그 길을 갔더라면' 하는 생각은

때때로 과거라는 감옥에 가둔 채 생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지 못한 사람들, 가지 못한 길들은 그저 '가능성'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평행우주 속의 또 다른 나를 상상하며

지금의 나를 원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스치지 않은 인연에 대한 미련은, 마치 지금 내 손에 쥔 다이아몬드 빛을 가리는 먼지와 같다.

그 먼지 때문에 진짜 소중한 것을 못 본다는 이야기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담담하게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현재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설 수 있다.

과거의 아쉬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도 덜어낼 수 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욕심을 내려놓을 때,

삶은 훨씬 더 너그러워지고 풍요로워진다.

이거야말로 인생의 고수들이 터득하는 비법 아니겠나.


행운을 음미하고,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다

결국 인생은 이 두 가지 태도의 조화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인연들을 '기적'이라 여기며 감사하고 소중히 대하는 마음.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며

자연의 섭리처럼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마음.

이 두 마음이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평온을 얻는다.

인생은 정답을 맞히는 시험이 아니다.

그저 주어진 질문을 끌어안고 가는 여정일 뿐.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하고 따지기보다,

'나에게 이런 만남이 주어졌구나' 하고 음미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지나간 시간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일종의 현자 타임이랄까.

오늘, 문득 내 삶을 스쳐간 수많은 인연들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행운과 기적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남은 날들은 충분히 따뜻하고 충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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