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요즘 알바 뭐 해?"
졸업반 취업 스터디 자리였다.
노트북 화면 속으로 친구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든 채 나는 그만 키보드 위에서 멈칫했다.
이력서에 쓸 한 줄이라도 더 채워 넣으려다 딱 걸린 참이었다.
옆자리 친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강남에서 과외해. 시급 완전 짱이지. 어차피 취업 준비하면서 돈도 벌어야 하잖아?"
괜히 으쓱대는 듯한 어조였다. 다른 친구도 질세라 거들었다.
"나는 스타트업 인턴 해! 대외활동 스펙도 쌓고, 나중에 경력으로도 쓸 수 있대!"
다들 뭔가 대단한 걸 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냥 동네 카페에서 진동벨이나 나르고 있는데.
그럼 나만 이런 소소한 알바나 하는 건가? 괜히 기가 죽었다.
열정적으로 알려주는 스터디 친구들에게 미안했지만,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시간은 흘러 내가 어른이 되고,
세상살이에 닳고 닳아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20대 후반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비슷한 풍경은 이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는
“난 이제 대기업 과장이야. 연봉도 괜찮고, 주말엔 골프도 치러 다녀.”라며 명함 지갑을 톡톡 두드렸다.
SNS 피드에는 친구들의 화려한 여행 사진과 명품 자랑이 넘쳐났다.
“부럽다…”라는 댓글을 달면서도 내심 씁쓸했다.
내 눈앞에는 뻔지르르한 명함 대신, 손바닥만 한 카페 키오스크 앞에서
서툰 손놀림으로 주문을 받던 내가 어른거렸다.
그 시절 나의 이름은 그 어떤 화려한 타이틀로도 불리지 않았다.
위대한 인턴십 경험도, 눈에 띄는 대외활동도 없었다.
그냥 평범한 동네 카페 알바생이었다.
하지만 새벽같이 일어나 매장 문을 열고, 커피 머신을 닦고, 손님들에게 밝게 인사하던 그 성실함이야말로 진짜 내 역사가 아니었을까.
손끝에 커피 원두 가루가 묻어도, 거품이 터져 옷에 튀어도 멈추지 않았다.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농담 삼아 "야, 요즘 누가 스펙 따지냐? 유튜브 구독자 수가 스펙이지!"라고 말하곤 했다.
다들 깔깔 웃었지만, 내 속은 좀 달랐다.
'경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여전히 카페에서 일했던 시간이 떠올랐으니까.
그 시간은 남들이 보기에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그 어떤 유세 떨 필요 없는 견고함이 있었다.
어느 날, 이력서를 들고 면접을 보러 갔다.
잔뜩 긴장한 채 면접관 앞에 앉았다.
면접관은 내 이력서보다 내가 썼다는 짧은 에세이에 더 관심을 보였다.
에세이에는 카페에서 일하며 겪었던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었다.
단골손님과의 작은 대화, 실수로 커피를 쏟았을 때의 당황스러움, 밤늦게까지 홀로 남아 마감하던 순간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진짜 '경험'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화려한 명함이나 번지르르한 직책에 새겨진 것이 아니었다.
진짜 경험은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고된 일상에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해낸 사람들의 단단한 정신.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대단한 스펙보다 더 위대한 유산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모두는 그런 위대한 일상의 후예다.
비록 빛나는 타이틀을 남기진 못했어도,
매일의 삶 속에서 희망을 길어 올린 진정한 베테랑이었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새벽 버스에 몸을 싣던 숱한 날들.
학자금을 위해 모았던 꼬깃꼬깃한 지폐들.
그 안에 담긴 성실함과 책임감이야말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튼튼한 기둥이었다.
나는 그 기둥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면접관을 바라보며 조용히 되뇌었다.
'이게 바로 나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의 선배가 되어간다.
훗날 후배들이 우리를 기억할 때, 과연 무엇을 떠올리게 될까.
'저 선배는 대기업 다닌대' 혹은 '저 선배는 학벌이 좋대' 같은 말보다,
'저 선배는 참 성실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었어'라는 한마디가 더 가슴 벅찬 칭찬 아닐까.
아니면 '저 선배는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어' 같은 말.
학벌이나 스펙 같은 낡은 옷은 이제 벗어던져도 좋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고, 지금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정직한 땀으로 하루를 채우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따뜻한 눈길을 건넬 줄 안다면,
이미 세상에서 가장 뼈대 있는 인생을 사는 자랑스러운 어른이다.
얼굴에 새겨진 미소 하나하나가 바로 그 명예로운 훈장이다.
내 얼굴에도 언젠가 그런 미소들이 새겨지겠지.
그 미소들이 나만의 훈장이 되기를 바라며,
나는 오늘 하루도 묵묵히 내 길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