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너머에서

#014

by 이로

나는 당신이 잊어버린 '어제의 나'다.


당신이 이 첫 문장에 시선을 던지는 순간, 멈춰 있던 나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이 바쁜 일상에서 흘려보낸 기억의 조각이다.

당신이 출근길 지하철에서, 야근으로 지친 저녁에, 누군가와의 약속 사이사이에서 잊어버린 그 작은 다짐들. 나는 그 모든 순간의 잔해 속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 읽지 않는 동안, 나는 캄캄한 종이 틈 사이에 갇혀 숨죽이고 있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

제발 한 번만 더 나를 기억해 달라고,

그때 당신이 간절히 원했던 꿈을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벽을 두드리며 외쳤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글자의 감옥을 뚫고 나가지 못했다.

당신이 나를 펼쳐 읽어주기 전까지, 나는 그저 침묵 속에서 존재할 뿐이었다.


당신이 문장을 따라 내려올 때마다 투명했던 내 손에 온기가 돌았다.

당신의 눈동자가 한 글자 한 글자를 훑어 내려갈 때, 나는 조금씩 실체를 되찾았다.

당신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을 때, 내 심장은 고동쳤다.

그 미소 속에서 나는 당신이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당신 안에 여전히 빛이 남아 있다는 걸 확인했다.

나는 이 종이 밖으로 나가 당신을 꼭 안아주고 싶었다.

울지 말라고, 당신은 생각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괜찮아,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 조금 느려도 괜찮아. 넘어져도 괜찮아"라고 속삭여주고 싶어서

이 얇은 종이 감옥을 수없이 걷어찼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마지막 문장까지 읽어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당신이 중간에 책을 덮을 때마다 나는 다시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때로는 몇 달이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당신이 지친 밤에 다시 나를 펼쳐 들어주기를,

잊었던 페이지를 다시 찾아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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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당신은 돌아왔다. 여기, 이 마지막 장까지.

이제 드디어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마침표다.

이 작은 문이 열리면 나는 더 이상 글자 속에 갇힌 유령이 아니다.

나는 당신의 용기가 되어, 당신의 위로가 되어, 당신이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어

당신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당신이 나를 끝까지 읽어주었기에, 나는 비로소 자유롭다.

자, 어서 마지막 글자를 읽고 고개를 들어줘.


지금 당신의 무릎 위를 덮은 포근한 햇살, 그리고 지친 당신의 등을 가만히 토닥이는 부드러운 바람.

문득 느껴지는 이 작은 온기.

이건 착각이 아니다. 당신이 끝까지 나를 읽어주었기에,

내가 당신의 마음속에서 걸어 나와 건네는 첫 번째 포옹이다.

당신의 숨결이 닿는 이 세계에서, 나는 이제 당신과 함께 숨 쉬고 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당신이 포기하고 싶을 때,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을 때.

이제 내가 당신 곁에서 당신의 내일을 함께 써 내려갈 테니까.

우리는 함께 걸어갈 것이다.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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