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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아이 콤플렉스

by 정희승

"우리 딸 때문에 산다."



엄마는 내게 말했다. 나 때문에 산다고.


그 말이 좋았다. 나 때문에 살아주는 엄마가 없다면 나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엄마만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하고 싶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부 잘하고 착한 딸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조금 수고스러울 뿐, 좁은 방에서 인형 하나 없는 꼬맹이는 엄마 심부름하고 집안일을 돕는 게 소꿉장난이라 생각했다.


엄마 옆에 붙어 앉아 종알거리는 딸이 엄마도 좋았다.


엄마와 대화하는 사람은 늘 나였다.


김치 담을 때, 텃밭에서 야채 뽑을 때, 찌개를 끓일 때, 장 볼 때, 빨래할 때.


엄마가 말하는 이야기 주인공은 대부분 할머니와 아빠였다.


힘들었던 시집 살이, 며느리를 부려먹는 고약한 시어머니 이야기와 그보다 더 고약한 남편 이야기가 전부였다.


혼전 임신으로 결혼한 스무 살 며느리를 할머니는 싫어했다고 했다.


아빠 돈보고 결혼한 여자라고.


옷장이며 서랍을 뒤져가며 엄마가 무엇을 샀는지 검사하고 잔소리했다고 한다.


그 시절 큰 봉제 공장을 하던 아빠 공장은 먼 친척까지 와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문턱이 닳도록 매일 들락거리는 친척들 밥 차리고 몇 백 포기의 김장은 모두 엄마 몫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대장부 스타일로 사람들을 거느리기 좋아했다.


삼 남매를 낳고도 큰 살림을 해야 하는 엄마는 쉴 날이 없었다고 했다.


아빠를 사랑한 적은 없었냐는 물음에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결혼한 거라는 말만 했다.


14살 많은 남자를 선택한 건 오직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고.


초등학생이던 딸이 엄마 눈엔 성숙해 보였는지, 친구 같은 딸이어서 그랬는지, 초등학생이 이해하기 힘든 아빠 과거까지도 엄마는 내게 말했다.


결혼하고 나서 아빠가 재혼이었다는 걸 알았다고.


고향에서 결혼했던 사실을 숨기고 결혼했다고.


두고두고 녹음테이프 돌아가듯 엄마는 반복해서 내게 말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엄마 표정과 말투는 똑같았다.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




"네 할머니와 아빠 모두 똑같은 사람이다.

얼마나 거짓말을 잘하는지.

지금까지도 발뺌하고 둘러대고 오히려 내게 윽박지르고."




엄마는 '그 엄마에 그 아들'이란 말을 자주 했다.


알고 싶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은 과거 이야기는 모두 엄마만 불쌍한 사람이었다.


나쁜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호된 시집살이를 당한 불쌍하고 가여운 며느리가 엄마였다.


친구도 없고 만나는 이 하나 없는 엄마는 늘 딸에게 한풀이를 했다.


엄마 한풀이를 계속 들어야 하는 이유는 엄마가 말하는 유일한 대화이기 때문이다.


한풀이 말고 다른 소재가 없으니까.




"엄마는 왜 친구가 없어?"라고 물으면 엄마 대답은 똑같았다.




"귀찮게 뭐 하러 친구를 사귀니.

엄마는 친구 필요 없어.

먹고살기도 힘든데 친구는 무슨."




자식만 있으면 된다는 엄마 말에 엄마는 다 그런 줄 알았다.


친구 없는 엄마가 주말마다 가는 곳은 외갓집이었다.


엄마 손잡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두 시간 걸려 도착하는 외갓집은 엄마와 여행길이자 데이트 코스였다.


오빠들과 함께 간 기억은 별로 없다.


온 식구가 갈 때는 명절이었고 엄마와 둘이 가는 외갓집은 수시로 자주였다.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와 이모, 외숙모와 이야기하는 엄마를 보게 된다.


딸에게 한풀이만 하는 엄마는 외갓집에서는 한풀이하지 않고 딸 자랑만 한다.




"희승이가 공부를 잘해.

이번에도 시험을 잘 봤어."



"쟤는 친구도 많아.

나한테 어떻게 저런 얘가 나왔는지 몰라."



"쟤는 노래도 잘해.

학교 대표로 교육방송도 나간대."




오빠들 자랑을 하는 건 못 들었던 것 같다. 거의 내 자랑이 전부다.


입이 닳도록 말하던 할머니와 아빠 이야기는 한 소절도 나오지 않는다.


외갓집에서 말하는 딸 자랑을 듣다 보면 나인데 내가 아닌 다른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내가 그렇게 공부를 잘했나? 내가 무슨 상을 받았었나?


신나 보이는 엄마 얼굴이 행복해 보여서 묻지 않았다.


조금 다르면 어때.


엄마가 행복하면 그만이지.


외갓집에서 행복해하던 엄마 얼굴이 시들어지는 시간은 딱 두 시간.


집에 도착한 엄마 얼굴은 다시 시들어지고 입을 다물고 부엌 부뚜막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변한다.


외갓집에서 웃던 엄마 얼굴을 매일 볼 순 없을까.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은 나는 내가 아닌 내 모습을 만들기 위해 책상에 앉는다.


공부 잘하고 인기 많고 노래 잘하는 착한 딸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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