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전에 파김치를 가져가라는 엄마의 재촉이 시작되었다.
"넌 매일 그렇게 바쁘냐?
집에 들르는 게 뭐가 그리 힘드냐!
허리 아파 죽겠는데 자식들 먹이려고 파김치 했다.
오늘 퇴근하면서라도 와서 얼른 가져가라.
힘들게 했는데 쉬면 맛없어져!"
바쁜 딸보다 엄마는 파김치가 쉴까 봐 걱정이 먼저다.
독촉 전화를 받기 전에 오늘은 파김치를 받으러 가야 한다.
11시간을 서서 내일 출고해야 할 상품들을 포장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친정으로 향한다.
밤 9시 30분. 3월의 밤은 아직 춥다.
창문을 열지 않고 음악을 듣는다.
박효신의 굿바이가 나온다.
노들길을 달리며 생각한다. 오늘 나도 굿바이를 해야 한다고.
친정에 도착하니 엄마는 미스터 트롯을 한참 보고 있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무심히 말한다.
"왔냐, 현관 앞에 김치 꺼내놨으니 가져가라."
소파에 누워있던 아빠는 내가 반가운가 보다.
"아이고, 딸내미 얼굴 보기 힘드네."
"엄마, 아빠 드릴 말씀이 있어요."
엄마는 TV를 보면서 듣겠다고 하시고, 아빠는 놀란 눈으로 일어나 앉는다.
"아빠, 그동안 제가 가족을 위해 참고 살았던 거 아시지요?
평범한 가정으로 보이고 싶어서, 가족을 지키고 싶어서 그동안 연기하면서 참고 살았어요.
그런데, 아빠를 모시고 병원 다니면서, 아빠를 매주 만나면서 숨쉬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어요.
이제는 저를 위해 모두 말하려고요.
오빠들에게는 미리 말했습니다.
아빠 성추행을.
이제부터 제게 연락하지 마세요.
병원 모시고 다니는 것도 모두 오빠들에게 부탁했어요.
왜 제게 사과하지 않으셨나요?
왜 모른척하고 사시는 건가요?"
엄마는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 내 얼굴을 본다.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중학교 때 아빠가 술 취해서 엄마인 줄 알고 실수했다는 거 말하는 거야?
기분 나쁘고 끔찍한 이야기를 왜 갑자기 꺼내는 건대!
너 혹시 성폭행당한 거야?"
"아니오.
성추행으로만 말씀드릴게요.
그런데, 엄마.
성추행은 용서되고 성폭행은 용서가 안 되는 그런 건가요?"
순간 시침이 멈춘 듯하다.
중학교 때, 아빠 실수라고 엄마가 말한다.
엄마는 기억하고 있다. 그날을.
혹시 알면서 모른 척 외면하고 있는 걸까?
'설마, 엄마 알고 있었어?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아이고, 내 팔자야.
TV에서나 나오던 친딸 강간범이 우리 집에 있었다니.
저런 놈을 내가 밥 해주고, 빨래해 주고, 같이 살고 있었다니.
아이고, 내 팔자야."
아빠는 놀라고 슬픈 눈으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난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
"뭐라고요?
딸을 사랑해서 추행한다고요?
그 오랜 세월 동안, 엄마가 야간 근무 갈 때마다 제가 얼마나 공포에 떨면서 살았는지 알긴 아세요?
저는 이제 다시는 이 집에 오지 않을 겁니다.
그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제 마지막 말이 될 거예요."
딸을 사랑해서 강간하고 싶었고 만지고 싶었다는 노인의 눈빛은 이젠 멀겋고 흐리다.
슬픈 표정의 멀건 눈빛은 자신의 행동을 다 알고 있다.
친부 성폭행 뉴스가 나오면 가슴이 콕콕 찔리고 아팠다고 말하는 아빠.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어도 변치 않은 그의 인면수심이 놀랍기도 하고 가엽기도 하다.
'이제 끝난 건가? 긴 세월을 숨겼던 비밀이 단 몇 분 안에 끝나는 건가?
앞으로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걸까.
엄마는 괜찮을까?
엄마는 아빠와 한 집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니야, 이젠 나만 생각하자.
지난 세월 잘 견뎌 온 거야.
잘한 거야...'
눈을 감고 중얼거리던 엄마 얼굴이 마음에 남는다.
불안함을 오빠들에게 넘긴다.
"방금 부모님께 말했어요.
엄마를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무슨 일이 생겨도 오빠들은 나를 원망하지 말아 주세요."
오빠들의 들숨과 날숨 소리가 들린다.
"걱정하지 마. 약 잘 챙겨 먹고 진료받으면서 좋아지길 바란다."
집에 도착하니 목이 탄다.
손도 씻지 않은 채 냉장고에 남겨 둔 맥주 한 캔을 꺼내 마신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소파에 앉아 생각한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어느새 남편이 현관물을 열고 나를 부른다.
"여보, 나 방금 부모님께 말하고 왔어.
엄마가 준 파김치와 명란젓.
이게 아마도 엄마에게 받는 마지막 반찬이 될 것 같아.
아껴 먹어야겠다."
아직 냉장고 앞에 있는 파김치와 명란젓을 보며 남편에게 말한다.
남편은 말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부모를 버렸습니다] 1장 엄마, 아빠 드릴 말씀이 있어요(p22~27) 본문 인용. 작가의 집. 정희승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