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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쪽배

by 정희승

50년 숨겨온 이야기를 고백했다고 다음 날이 달라지진 않는다.


여전히 아침은 밝았고, 일상은 움직인다.


새벽에 일어나 밥을 차리고 아들 등교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이부자리를 개고,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한다.


여전히 주문서는 밀려있고, 야근은 계속된다.


똑같은 일상, 똑같은 하루가 지나는데 나만 다른 세상에 떠 있는 기분이다.


걸을 때 뒤꿈치가 들리는 것 같다. 둥둥 떠다니는 머릿속처럼 발걸음도 불안하다.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울먹이며 단 한마디 말을 남긴 엄마는 다음날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왜 그동안 숨겼냐! 난 네가 무섭다.

사돈, 며느리가 알까 봐 두렵다고.

양서방 입단속 잘 시켜!"



엄마가 던진 칼을 맞고 그대로 무너진다.


엄마는 딸을 보호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외면해야 할 존재로 선택했다.


보이는 삶이 중요한 사람.


남편에게 매 맞는 여자여도 머리카락 한올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고 깔끔하게 꾸미던 사람.


육성회비는 밀려도 가난해 보이면 안 된다고 계절마다 영등포시장에서 옷 한벌씩 사주던 사람.


폭행하는 남편과 불행하게 살아도, 공장 다니며 적은 월급을 받아도, 몇 달을 모은 쌈짓돈으로 백화점에서 코트를 사는 사람.


불행해도 행복해 보여야 하고, 가난해도 부유해 보여야 하는 사람이 아빠에게 성추행 당한 딸과 사위에게 입단속을 요구한다.


당신 인생이 쪽팔리기 싫어서.


범죄자 아내로 살고 싶지 않아서.



우주였던 엄마가 부서진 쪽배였음을 인정하기 힘들다.


태어나보니 아빠가 악마였던 것도 억울한데, 모형만 엄마인 엄마를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나를 무너지게 만든다.



'죽어야 하는 인생이었을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정신이 번쩍 든다.


죽기는 왜 죽어. 나만 바라보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데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


비정상 부모가 비정상인 것을 정상인 내가 왜 괴로워해야 하는가.


억울하면 더 일어나야 한다.


사랑하는 내 가족을 위해 더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


식욕이 없어도 밥을 입에 넣는다.


우물우물 꼭꼭 체하지 않도록 오래 씹는다.


약을 먹고 물을 마시고 명상을 한다.


명상이 끝나면 가벼운 요가로 몸을 풀어준다.


요가가 끝나면 유튜브 영상을 틀어 글쓰기 공부를 시작한다.


공부하고 쓰고 독서하는 빠듯한 계획을 잡고 계획표대로 일상을 보낸다.


나는 일어날 수 있다고 다짐하면서.


그래도 문득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바라본다.


친정벨소리가 사라진 핸드폰을 보며 엄마가 그리워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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