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문 앞에 늑대가 있다.

by 정희승

온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주말 저녁.


악귀 드라마에 빠진 가족은 숨죽이며 시청한다.


여주 구산영과 악귀 구산영이 대치하는 긴박한 상황이다. 방문을 열려는 악귀와 방문을 막는 구산영.


책상을 밀고 온 힘을 다해 문을 막고 있다.


나는 밥 먹다 말고 갑자기 흐르는 눈물에 당황해서 밥그릇을 들고 얼른 일어난다.


싱크대에 그릇을 넣고 물을 튼다.


다행히 물소리에 흐느끼는 소리가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방문을 막으며 공포에 떠는 구산영이 나처럼 보였다.


15살 내 모습.


우울증은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이동시키고 있다.


8살 때로, 15살 때로, 지우고 싶던 기억, 그 장소, 그 감정으로 나를 옮긴다.


외면하지 말라고 감정이 말한다.


눈물로 흘려보내라고 가슴을 심하게 두드리고 있다.


어린 너를 봐야 한다고, 지우고 싶은 기억을 정리해야 한다고 눈물로 소리친다.


몸에 중심을 잃고 흐느적거리는 나는 감정이 이끄는 대로 흘러간다.







15살이던 어느 날.


술냄새를 풍기며 현관문을 연 아빠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것 같은 느낌.


안마를 시키다 돌변하던 그 눈빛보다 더 강렬한 느낌.


가족만 없으면 달라지는 눈빛이었다.


아빠가 아니라 늑대가 되는 시간은 정해져 있다.


딸과 둘이 있는 공간에서만.


술냄새가 없어도 돌변하는 눈빛이 술기운까지 더해지니 그날 밤은 공포였다.


미리 방문에 못을 박길 잘했다.


빨랫줄을 넉넉하게 끊어내길 잘했다.


불 꺼진 안방을 보고 건넌방 방문에 박힌 못과 손잡이에 빨랫줄을 여러 번 감는다.


내 손과 손목까지 함께 동여맨다.


굶주린 늑대 분위기를 나는 직감하고 있었다.


점점 침 흘리는 늑대 표정이 사람 가면을 벗고 짐승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오빠들이 없는 밤은 내게 공포였다.


누군가는 있어야 하는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숨을 쉴 수 없었다.


늑대 앞에 던져진 어린양은 이 밤을 지켜내야 한다.


꼭 살아야 한다.


불 꺼진 안방문이 드르륵 열린다.


한 뼘 거리 건넌방 문을 열려는 움직임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살금 거리며 열려던 문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당황한 늑대는 다시 조금 더 힘을 주어 달그락거린다.


달그락달그락달그락.


몇 번을 시도해도 열리지 않는 문 밖에서 짐승 소리가 들린다.


"문 열어봐."


짐승에게 응답하는 것조차 두려움이다.


빨랫줄만 꼭 쥐고 있을 뿐 숨소리조차 새어나갈까 봐 입술을 깨문다.


빨랫줄을 잡고 눈을 감고 기도했다.


짐승이 사람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사람으로 변해서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달라고.


그 밤.


나는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기도에 응답하는 하나님이 계셨다고 믿고 있다.


아니면 할머니 방이었던 건넌방에서 할머니 혼과 함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그 방에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죽기 전까지 할머니 곁을 지킨 손녀가 늑대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지켜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들이 늑대가 된 죄책감을 품은 어미 마음으로 할머니는 나를 지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과 할머니의 합심으로 늑대는 잠시 사람으로 변했다.


실랑이로 끝낸 늑대는 분명 사람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문을 부수지 않았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곧이어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골목을 지키는 전봇대 등불이 창문을 비춘다.


어두운 방에서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비릿한 피냄새가 올라온다.


그제야 손바닥이 쓸렸다는 걸 알았다.


나일론 줄에 쓸린 여린 손바닥은 까지고 피가 흐른다.


잠옷에 닦으면 엄마가 걱정하겠지, 옷에 닦지도 못하고 휴지도 찾을 수 없는 캄캄한 방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 손에 얼굴을 묻은 채 하염없이 울었다.


오늘은 살았지만 내일도 살아낼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 밤이 엄마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엄마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아빠가 강간하려 한다고 말해야 할까.


강간이란 단어는 꺼내면 안 된다.


왠지 그 말만은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사실 강간이 정확히 뭔지도 잘 모른다. 어디서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읽은 것 같기도 하다.


15살 나이에 내가 아는 그 말은 그냥 무섭다는 거다.


그리고 가족이, 아빠가 하면 안 된다는 거.


엄마가 알면 죽고 싶은 감정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거.


강간이란 말을 빼고 어떻게 엄마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둠이 밝아지고 있을 무렵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새벽이 왔구나. 엄마가 왔구나.


살아냈다는 감정을 뒤로하고 엄마에게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시작으로 머리가 아파온다.


대문 앞에 서있는 나를 보고 엄마가 놀란다.


"너 안 자고 왜 나와 있어?"


"엄마.. 아빠가 내 방에 오려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밤에 아빠가 안 자고 내 방 문을 열려고 했어."


엄마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잠시 얼음이 된 것 같아 보였다.


손바닥을 감추고 있었지만 엄마는 내 얼굴을 봤다.


밤새 울어 퉁퉁 부은 얼굴을 보면 알았을 것이다.


그 밤 무슨 일이 있었을지 짐작했을 거다.


하지만 엄마는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자고 있는 아빠를 흔들어 깨웠지만 아빠는 일어나지 않았다.


"희승이 방에 왜 들어가려 했어요?

안 자고 딸 방에 왜 들어가려 했냐고요!

일어나 봐요!"


"술 취해서 기억 안 나.

취해서 당신인 줄 알고 그랬나 보지 뭐."


흔들어도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잠에 취한 것처럼 아빠는 연기하고 있다.


술 취하지 않았는데, 분명 똑바로 들어왔으면서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어렸을 때 안마를 시키다가 내 몸을 더듬는 그 손이,


이불속에서 내 몸을 더듬던 그 손이 무엇인지 알았다.


가족 모르게 간음하고 있는 손이었다는 걸.


간음이 강간으로 바뀌고 있다는 걸 그때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keyword
화, 목 연재
이전 08화부서진 쪽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