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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향기 Mar 12. 2024

뭐가 잘 사는 걸까

<명상록>을 읽고

 "이성적인 정신의 속성들은 이런 것들이다. 자신을 보고, 자신을 분석하며, 자신의 뜻대로 자기를 만들고, 자신의 열매를 자기가 거두며, 삶이 어느 때에 끝나든 자신의 고유한 목표를 달성한다. "


 명상록의 한 구절이다. 이성적으로 산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는 첫째, 자신을 보고 자신을 분석하는 것이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둘째, 자기가 의도한 대로 목표한 대로 자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인내와 절제가 필요하다. 셋째, 그렇게 할 때 자기가 목표한 바 열매를 거둘 수 있으며, 그것은 삶이 어느 때에 끝나든 상관이 없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도록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가? 


 모르겠다. 첫째와 둘째가 있어야 셋째 결과가 얻어지는 것인데, 첫째와 둘째 모두 단계적인 과정이 아니다. 하나가 끝나면 하나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첫째 둘째 모두 현재진행형이다. 첫째, 둘째가 원인이 되어서 셋째가 발생하므로, 그래서 알고 보면 첫째, 둘째, 셋째 모두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 진행형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일찍부터 자신을 잘 바라보고 자기가 원하는 바를 목표로 해서 열심히 달려간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몰라서 한참을 헤매다가 어떤 운명과 우연에 이끌려 직업을 가지고 그에 따른 인생을 살아간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매진해서 다 이루어놓고도 그 길을 떠나 다시 새로운 길에 도전하기도 한다.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알고 싶다. 그 사람은 도대체 왜 그러고 사는 건지. 그 아이는 도대체 왜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그것밖에 안 하는 건지. 이제는 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현저히 적다는 사실을. 그러나 안타까운 마음은 여전하다. 오래도록 그 문제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는다는 것이 이전과는 달라진 점일 거다. 


 그렇다. 바꿀 수가 없다. 인생은 마치 누가 계획해놓은 것마냥 그렇게 흘러간다. 분명히 내가 선택한 것인데도 내가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그래서 기뻐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그 기쁨 뒤에 오히려 더 큰 절망이 찾아오기도 하고 절망 뒤에 오히려 더 큰 기쁨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함정이 있지만. 인생은 그렇다. 내 뜻대로 전혀 되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더이상 착하게 살고 싶지가 않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우주를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라고 명상록의 저자는 말하지만, 그렇게 살다가 저 넓은 우주의 한 줌 먼지밖에 되지 않을 인생이라면 왜 그렇게까지 힘들게 살아야 할까. 그렇게 사는 게 힘들다는 건 알기나 할까. 안타깝게도 똑같은 상황을 겪어도 늘 더 힘든 예민한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나도 안 그런 척하고 있지만, 사실 반골의 기질이 있는 건가. 잠재되어 있어 쉽게 나타나진 않지만, 글쎄, 어쩌면 언젠가 행동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다 어느정도는 잘 살았으면 좋겠다.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들면 도망이라도 갈 것이지 죽기는 왜 죽는 걸까. 누구는 그랬다. 도망갈 곳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죽는 거 아니겠냐고. 


 남은 눈물나고 속터지는데, 고상한 이야기를 하는 명상록의 저자에게 분을 쏟아내고 싶었나보다. 읽을 때는 멋진 말이라고 밑줄긋고 메모하며 읽었건만 지금은 또 마음이 이렇게나 바뀌었다.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일까.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도록 나는 지금 무엇을 바라고 살아야 할까. 우리 가족이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가장 바라는 것인데도 나는 여전히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고 있나보다. 만족이 안 된다. 늘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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