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오빠,
제가 대학에 다닐 때는 '대학생과외금지법'이라는 게 생겨서 어려운 형편에 있는 대학생들이 조금은 쉽게 공부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는 생각이네요. 저는 정말이지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어요. 아르바이트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못할 정도로 바쁘게 일을 했어요.
고급 아르바이트는 병원이나 의료원 같은 데서 공인회계사를 도와서 의료수가를 계산하는 것이었고요. 하루 종일 계산기를 들고 기다란 숫자를 쳐서 나온 합계를 맨 아래에 연필로 기록해 놓는 것이었어요. 그러면 공인회계사가 두 번 할 일을 한 번만 해도 되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다음으로는 공공기관에서 사무보조를 하는 것이었어요. 시청이나 구청, 동사무소 같은 데서 민원서류를 떼어주거나 서류분류를 하거나 날짜 도장을 찍어야 하는 서류에 한 나절 내내 도장을 찍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대부분은 힘든 일이었어요. 설날이나 추석 명절 즈음이나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에 백화점에서 판촉활동도 해봤고요. 집집마다 다니면서 인구조사도 했어요.
언젠가는 의대 다니는 친구가 어디를 한 번만 같이 가자고 해서 가보니까 율무차, 쌍화차 등 온갖 차를 집집마다 가지고 다니면서 파는 회사였어요. 그 친구도 대학생 과외를 못 하니까 생활비가 쪼들렸던지 그 일을 아르바이트로 하고 있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 회사에서는 물건을 전혀 팔지 않아도 사람만 많이 데려가면 돈을 버는 일명 다단계회사였던 모양이에요. 사람 1명 데려가서 그 사람이 물건을 팔면 데려간 사람에게 돈을 주는 식이었어요. 저는 물건 파는 일이 적성에 안 맞아 돈도 못 벌고 곧 그만두었지만, 그 친구는 그 일을 해서 돈을 꽤 번 듯해요.
또 생각나는 게 있네요. 교통 안내, 강연이나 방송 녹화 관중, 이런 것도 했어요. 방송 찍는 게 다 사람들이 와서 듣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일당을 주고 동원하는 청중들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세상에나 별 걸 다 해봤네요.
여름과 겨울 방학 동안에는 거의 한 달씩, 두 달씩 아르바이트를 했고, 학기 중에도 틈틈이 일거리만 있으면 했어요. 새 학기가 시작되면 직업보도실 앞을 서성댔어요. 새로운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나 하고요.
그러고 보니까 대학교에서 하는 일도 있었네요. 근로장학금을 신청해서 받으면 일정시간만큼 교내에서 일을 했는데 대학 도서관에서 책 정리를 하거나 파손된 책을 수리하는 일도 했었네요.
이렇게 구구절절 아르바이트 사연을 쓰는 것은 O오빠를 아르바이트 인연으로 만났기 때문이에요. 직접은 아니고, 한 다리 건너서 만났지만요.
제가 한 번은 여름방학 동안에 우리 동네 동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사무보조를 했어요. 그런데 동장님이 사무관이셨는데 '등고회'라는 산악회 회장을 맡고 있었어요. 가끔 점심식사나 저녁식사를 사주시기도 했는데, 하루는 산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으셨지요.
"학교 친구랑 같이 와요. 그냥 몸만 오면 돼요."
그래서 B친구와 함께 산악회에서 가는 산행을 가기 시작했지요. 그때 우리를 맡아주신 분이 바로 O오빠였어요. O오빠는 서울시 고급공무원이었는데, 그 산악회에 나오고 있더라고요. 나이는 우리보다 한 열 살 정도는 더 많은 듯했어요. 알고 보니 등고산악회가 서울시 소속 공무원들로 이루어진 산악회였어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네요.
우리는 산행비도 안 내고 도시락도 안 싸고 거기다가 O오빠의 개인 리딩까지 특별혜택을 입으면서 산행을 했었네요. B친구와는 꽤 오래 산행을 같이 했어요. 가끔 다른 친구들도 산에 데리고 갔지만 힘들다며 곧 그만두었고요. B친구와는 보폭도 호흡도 잘 맞았어요. 우리가 설악산, 지리산, 치악산, 유명산 등 꽤 많은 산을 가보았네요.
산악회 회장님은 매달 산행 일정표를 봉투에 담아 짤막한 손 편지를 써서 제게 보내주셨어요. 가끔은 O오빠가 개인편지를 보내오기도 했지요. 그때는 전화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서요.
"이번 산행에는 꼭 오면 좋겠다. 얼굴 보자."
그렇게 대학 1학년 때 시작된 산행이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닐 때까지도 이어졌어요. 언젠가부터는 B친구도 빠지고 저만 그 산악회에 다니고 있었네요.
그런데 제가 결혼을 하고 산에 가지 않으면서 O오빠와도 B친구와도 소식이 끊겼어요. 인천에 사는 B와는 한동안 손 편지를 했었는데 지금은 연락이 안 돼요.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B친구의 소식을 아는 대학친구들이 한 사람도 없어요.
얼마 전 한밤 중에 톡이 들어와서 깜짝 놀랐어요. 바로 O오빠였어요.
"이거 순오 맞니?"
제가 새벽형 인간이라 그날따라 더 일찍 눈을 떠서 책을 읽고 있었어요. 아마 새벽 두세 시 정도 되었을 거예요. 카톡 프로필을 보니까 '누구 아빠'라고 쓰여 있는데, 제가 애들 이름을 알고 있어서 얼른 답장을 했지요.
"O오빠예요?"
주거니 받거니 한참 톡을 했었네요.
O오빠는 우리 두 사람을 엄청 찾았다고 했어요.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 가서 자리를 잘 잡았다고 했고요. 아마도 두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이민을 간 게 아닐까 짐작을 해보네요.
O오빠는 그때 산행할 때 찍은 사진들이 한 장도 없다면서 보내줄 수 있냐고 해서 앨범을 꺼내서 핸폰으로 찍어서 보내드렸어요. 그건 산악회 회장님과 O오빠가 찍어주신 사진들이에요. 사진을 보고 오빠는 감회가 새로운지 눈물을 글썽글썽하셨어요.
"B친구 찾으면 같이 미국 한번 다녀가렴. 한 보름에서 한 달 정도는 오빠가 비용부담 없이 풀코스로 여행시켜 줄 수 있는데, 그 정도 능력은 되는데. B친구 찾으면 연락해. 초대장과 비행기표 두 장씩 보내줄게."
오빠는 통 큰 제안을 했어요. 저는 한 번도 미국을 못 가봐서 상당히 구미가 당겼어요.
"그렇지만 그 친구는 지금 연락이 안 돼요."
"그럼 순오 혼자라도 괜찮아. 용기만 있다면 언제라도 얘기하렴."
그렇게 우리는 한밤중의 톡을 했네요.
그런데 아무리 옛 추억이 있다고 해도, 지금은 O오빠가 칠순이 가까운 나이라 해도, 산행하면서 친오누이처럼 지냈던 남자라 해도, 멀고 먼 이국땅 미국이라는 나라에 여자인 제가 혼자 갈 수는 없는 일이지요. 남녀가 유별한 세상인데 말이에요.
"오빠 말씀은 고맙지만 어려울 듯해요. 제가 바빠서 긴 시간은 내기가 어려워요."
저는 그렇게 O오빠의 미국여행 제안을 거절했어요.
O오빠,
저를 기억해 주어서 고마워요. 그때 산행을 잘 가르쳐주어서 감사해요.
"앞을 보고 한발 한발 걷다 보면 어느 순간에 산 정상에 도착하지. 아무리 힘든 산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걸으면 가능해."
지금도 저는 산행을 좋아해서 매주 한 번은 산에 가요. 걸으면서 O오빠와 친구 B를 생각하죠. 아니 그때 함께 했던 분들도 생각해요. 그때가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음을 실감하죠! O오빠도 B친구도 참 많이 보고 싶어요. 우리를 연결해주신 그 당시의 등고회 회장님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