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아,
너를 찾고 싶어서 이름을 불러봐. 네 이름에는 선과 악이 함께 있어서 누구나 한번 들으면 잊어버릴 수 없지. 그런데 나는 왜 그랬는지 대학 다닐 때 네 이름이 특별하다고 생각은 못해봤네. 그랬으니까 한 번도 이름 뜻을 안 물어봤겠지. 선과 악이 함께 있으면 중간인데, 그러면 딱 좋은 이름이 아닌가 싶어. 요즘은 너무 착해도 살아가기가 어렵고 또 너무 악하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니까 손해 안 보면서도 자기 것은 잘 챙기는 똑 부러지는 사람이 인기라잖아. 그렇지만 내가 알고 있는 선악이는 착한 축에 들었어. 내 친구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너랑 나랑은 사는 곳이 거의 정반대였음에도 함께 한 시간들이 참 많았네. 너는 인천 십정동이라는 곳에 살았고, 나는 서울 강북구(당시에는 도봉구에서 강북구가 분리되기 전이라서 도봉구였음) 번동에 살았는데도 말이야. 우리가 졸업 후에 편지를 꽤 주고받았었네. 너의 집 주소가 어렴풋이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이라는 것까지 기억나는 걸 보면 그만큼 주소를 많이 적었다는 뜻이거든.
선악이 너랑은 같은 경영학과 A반이었고(반이 A반, B반 두 반이 있었는데 가나다 순으로 반을 나누었었지), 반도문학회라는 대학연합 문학 서클에 가입해서 다녔었네. 그리고 나랑 등고산악회에서 산행을 함께 했었지. 지리산 산행이 특별히 기억에 남네. 운무가 가득했었는데 천왕봉에서 너랑 같이 찍은 사진이 있어서 가끔 들여다봐. 한 번은 블랙야크 100대 명산을 찍으면서 과거 추억의 등반 사진을 올리라는 이벤트가 있어서 거기에도 너랑 찍은 사진을 올렸었지. 혹시나 너를 찾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야. 그렇지만 아무 데서도 연락은 없었어. 그 소식이 너에게 전달되지 못한 거지.
선악아, 우리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무엇이 그리 힘들었을까? 너랑 학교 앞 술집에서 소주 두 병을 놓고 깡소주를 마셨던 일도 생각나네. 그 당시에는 여자 아이들도 담배를 많이 피웠고 술도 꽤 마셨어. 하긴 우리가 거의 매일 독재 타도를 외치며 데모를 했으니까 그게 괴로운 일일 수 있었네. 학교는 수업하는 날보다 휴강하는 날이 많았고, 학교 입구부터 교문 앞까지 전경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학교 안에도 사복 입은 경찰들이 들어와서 우리를 감시했었지. 그게 힘들었을까? 우리는 자주 술집에 앉아서 술을 마셨고 가끔은 깡소주도 마셨어. 안주는 비쌌으니까. 참, 그때 '대학생과외금지법'이 생겨서 우리가 돈도 없었네.
나는 재수하던 시절에 어느 교회에서 청년부 산상수련회에 갔다가 돌아온 후 교회를 안 나가고 있었어. 처음에는 마땅한 교회를 찾아보느라고 그랬고, 누구 전도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고, 그런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까 아주 안 나가게 되었지. 나는 자연스럽게 당시의 분위기를 따라 술을 배워서 마셨고, 담배도 피워보려고 했지. 그런데 심폐기능이 그다지 좋지 않은 건지 나는 담배 한 모금을 빨았다가 숨이 막혀서 거의 초주검이 되었었지.
"담배는 안 되겠다."
그 후 다시는 담배 피워볼 생각을 안 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물론 술도 다시 교회에 나가면서부터는 안 마시게 되었어.
그리고 내가 집이 가난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데모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그것도 다행이라 여겨보네. 그 당시에 열심히 데모했던 친구들은 경찰에게 잡혀가서 감옥에 갇히고 심문을 받고 학교에서도 퇴학당하고 그랬거든. 나는 비겁해서라기보다는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어떻게든 학교는 졸업을 하고 싶었어. 왜냐고? 쉽게 들어온 대학이 아니었기 때문이야. 여러 번 재수를 했고 E여대는 대학입시의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내게 기적처럼 합격을 안겨 준 곳이었거든.
우리 문학 동아리 <반도>에서는 책도 읽고 우리가 써낸 글을 합평하면서 많은 논쟁을 했었지. 후에 우리 문학 동아리에서는 신문기자가 된 선배도 있었고, 대체로 선배들이 직장을 잘 구해서 간 듯해. 그러고 보면 문학 동아리 치고는 우리 <반도>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달리 아주 극좌는 아니었고 비교적 중도에 가까운 색채를 띠었었나 봐.
선악이 너도 데모는 좀 했을 거야. 감옥에 갈 정도는 아니었고, 누구나 다 학교 대강당 앞 광장에 모여서 "독재 타도 민주 사수" 같은 글귀가 적힌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아침 이슬> 같은 노래를 부르긴 했으니까 거기 앉아 있었다는 의미에서야.
암튼 그때 함께 산행했던 분이 최근에 연락이 되었는데 널 찾으면 미국에 초대해 주신다고 했거든. 그래서 미국 갈 기회가 생기려나 기대를 해보네. 우리가 꼭 미국에 가지 않더라도 그분이 한국에 들어오면 함께 만나 밥도 먹고 차도 마셔도 좋고, 가까운 근교산을 같이 올라봐도 좋겠네. 선악이 널 생각하면서 O오빠를 추억하는 일이 싱그럽네. 가슴에 퐁퐁 맑은 샘물이 솟아나!
"우리, 그때가 참 좋았네!"
아, 그리고 선악이 너는 화장도 안 하고 학교에 다녔는데 그야말로 천연미인이었지. 어느 유명 탤런트가 너보다 더 예쁠까? 넌 계란형 얼굴에 눈코입이 다 또렷했어. 굵게 쌍커풀진 눈이었고 웃으면 양볼에 귀여운 보조개가 피어났지.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게 길었는데 생머리였지. 지금도 그대로지? 어떻게 달라졌을까? 네 모습이 정말 궁금하네. 꼭 연락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