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야,
너를 생각하면 고마운 일들이 많네. 대학시절 우리는 같은 과 A반이었고, 함께 한 시간도 많았네.
입학하고 이야기 듣기에는 넌 충분히 S대에 갈 수 있는 실력이었지만 여대를 선호해서 우리 학교에 왔다고 했어. 아마 우리 과 수석이었다지.
우리는 입학하면서부터 공부보다는 데모를 많이 하는 분위기에서 학교에 다녔지. 대부분의 애들은 거의 데모를 하기 위해서 학교에 오는 사람들 같았어. 그런데 너는 아버지가 정치인이어서 데모는 하지 않고 그저 공부만 했지. 나 역시 삼수 후에 대학에 들어간 상태라서 아이들과 나이 차이도 많이 났고, 또 어렵게 들어간 대학이라 데모를 하다 잘릴까 봐 걱정이 되었어. 무엇보다 아르바이트하는 시간 때문에 데모할 시간이 없었다고나 할까? 가끔은 교문을 지키고 있는 경찰들 때문에 광장 앞에 모여있는 애들 옆에 가만히 앉아 있기는 했지. 그렇지만 일정이 그러했기에 너랑 나랑은 늘 혼자일 때가 많았지. 강의실, 학생 식당, 도서관 등에서 너와 나는 자주 마주쳤어. 가끔은 학생식당에서 같이 앉아 밥을 먹기도 했어. 그리고 네가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원서로 된 전공책 번역해 놓은 걸로 리포트 쓰는데 도움도 받았고 말이야.
특별히 기억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네.
하나는 내가 술에 취해서 집에 간다면서 버스를 탔는데 잘못 타서 엉뚱한 장소에 내려서는 그만 길가에서 필름이 끊긴 거야. 정신이 들어서 깨어보니 경찰이 나를 데려가서 파출소 의자에 앉혀놓았더라고. 집에 전화를 하라더라고. 그런데 술김에도 집에 연락하면 당장 학교를 그만두라고 호통을 칠 것 같았어. 그래서 전화번호를 댄 게 바로 너의 집이었어.
"P야, 나 데리러 올 수 있어?"
너는 단숨에 택시를 타고 와서 네가 사는 여의도 아파트로 나를 데려가서 너의 방을 내주고 너는 다른 방에 가서 잤어. 네 방에는 특이한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는데 술김이어서 그런지 뚜렷하게 기억은 안 나네. 장애우가 그린 그림 같았는데 '꾸준히 노력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수묵화풍 그림이었지. 아침에 깨어보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어. 한 10시쯤 되었을까? 부모님이 출근하시고 좀 늦은 시간에 네가 콩나물국을 끓여서 같이 먹자고 해서 부엌으로 가서 아침밥을 먹었지. 지금의 숙취해소제 비슷한 것도 주어서 먹은 듯해. 너는 한 번도 왜 내가 그렇게 술이 취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어. 그날도 그 이후에도 말이야. 그저 묵묵히 이해하고 도움을 주었지. 나는 그런 네가 참 고마웠어.
두 번째로 기억나는 것은 너의 아버지가 세계적인 체육대회 조직위원장으로 일하실 때야. 나는 체육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경기관람 같은 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어. 물론 입장료를 내고 가는 거라 돈도 없었고. 그런데 너는 아버지가 주신 개막식과 폐막식뿐만 아니라 경기관람 초대장도 여러 장 주었지. 그래서 서울운동장, 잠실종합운동장 관람석에서 운동경기 관람을 했다는 거야. 그 이후에도 나는 경기장에는 다시 가지 않았을 거야.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인가? 아니다. 아, 참! 섬기던 교회학교에서 초대권을 여러 장 주어서 우리 가족 모두 같이 마포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아이스링크 같은 걸 본 적도 있네. 가끔 장충체육관 같은 데서 하는 연극이나 뮤지컬도 본 적이 있고 말이야. 그렇지만 내 돈을 내고 경기장에 가본 적은 없어. 섬기는 게 몸에 익은 사람들 덕분에 비싼 티켓을 사지도 않고 초대권을 받아서 소중한 순간들을 볼 수 있었지.
세 번째로는 네가 대학 졸업 후에 미국유학을 갔을 때 손 편지를 주고받은 일이야.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가 되면 안부를 묻는 손 글씨로 꼭 카드도 보내주었지. 우리는 긴 손 편지도 썼어. 나는 네가 보내온 카드와 손 편지를 몇 장 가지고 있어. 너의 필체는 시원시원하고 글은 다정다감하지.
한국에 다니러 올 때는 네가 다니는 대학 마크가 새겨진 커다란 맥주컵 모양의 도자기컵 선물을 사다 주었지. 내가 지금은 술을 안 먹어서 그 컵을 그림 그리는 붓꽂이로 잘 사용하고 있어. 컵을 볼 때마다 생각하지. 네가 나의 많은 지인과 친구들 중에서 다른 그 누구보다도 나를 가장 많이 생각해 주었다는 걸 말이야. 너는 늘 말이 없지만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적극적이었어.
그리고 또 하나가 있네. 내가 수원으로 오면서 카페교회를 해보려고 시도했을 때야. S경찰서 경목실에서 일할 때였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전도사님이 있어서 그이가 카페교회를 하면 함께 하려고 했지. 주일에는 경목실에서 아침에 일찍 의경들과 예배드리니까 마치고 가서 주일 낮예배도 드리고 도와주면 좋겠다 생각했지. 그런데 갑작스럽게 그이가 빠지는 바람에 내가 카페교회를 맡게 된 거야. 경목실 일과 카페교회 일을 병행할 생각이었지. 그 소식을 들은 너는 내게 약 1년간 매월 후원금을 보내주었지. 교회 권사님들에게 기도부탁도 했고, 그분들에게까지 내 계좌번호를 알려주어서 후원금을 보내오기도 했어. 너는 하늘에서 보내준 작은 천사의 손길이 되어 주었지. 그렇지만 뜻하지 않은 일로 나는 S경찰서 경목실 사역도 카페교회도 둘 다 내려놓게 되었어. 그 후 지리산 지역에 이력서를 내서 일터를 얻어서 내려갔다가 돌아와서 신학원에서 강의하다가 지금은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어. 비록 카페교회를 이루진 못했지만 소중한 경험이었어.
내가 자꾸만 작아지는 동안, 너는 자꾸만 커져 갔지. 얼마 전에는 네가 학장이 되었다는 소식이 왔어. 늘 만나 걷기도 하고 밥도 같이 먹는 대학친구들이 축하를 보냈지. 나도 축하와 축복을 보냈어.
"이다음에 총장이 된다는 소식도 오면 좋겠다."
친구들은 모두 한 마음이었어. 그러고 보니까 너의 남편도 학장인데 부부가 학장이네.
"두 학교의 역사에 길이 남는 학장이 되길 기도해."
난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그때그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듯해. 언제나 나를 도와주는 이들이 있었지. 내가 추억을 먹고사는 이유랄까? 힘들 때마다 그 어려움의 한가운데로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나를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지. 그래서 앞으로 남은 생애도 별로 걱정은 안 해. 아직 많은 것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꿈과 목표를 향해 여전히 꾸준히 열심히 가고 있으니까 말이야.
P야.
네가 내 친구라서 자랑스러워! 항상 '순오언니'라고 불러주는 대학친구들이 사랑스러워.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음을 감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