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야,
내게 소중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언제나 한결같이 옆에 있어주는 사람, 그윽한 눈으로 지켜보며 응원을 아끼지 않는 사람, 어렵고 슬픈 일에는 위로해 주고, 기쁜 일에는 축하해 주는 사람, 있는 모습 그대로 가치 있다고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어. 이렇게 볼 때 내 기준에서 너는 내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야. 마음속으로 너를 지금의 내 단짝친구라고 명명해 두었지.
H,
너는 여고시절 2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 너는 내 옆자리, 아니면 뒷자리에 앉았을 거야. 우리가 키가 제법 컸었네. 뒤에서 두 번째 자리쯤 앉았던 것 같아. 너랑 나랑은 동아리를 같이 한 적도 없고, 신앙이 같았던 것도 아니고, 여고시절에는 뚜렷하게 기억나는 게 별로 없네. 그런데 너는 내가 기억난다고 했어. 우리가 앉는 자리가 가까워서 이야기를 많이 했었나 봐, 그렇지?
내가 재수할 때, 네가 대학을 졸업할 때였나 봐. 국문과에 다니고 있던 너는 고전소설로 학위논문을 쓰고 있는 듯했어. 나에게 사씨남정기, 장화홍련전 등 우리나라 고전소설 전집을 한 아름 갖다 주면서 읽고 내용을 요약해 달라고 했어. 아마도 논문에서 인용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꼼꼼하게 읽을 틈이 없었나 봐. 나는 그것을 모두 읽고 줄거리를 요약해서 너에게 주었어. 그 후 너는 졸업을 했고 대학원에도 들어갔고 말이야. 네 덕분에 고전소설책을 사지도 않고 몽땅 다 읽었네.
우리가 손 편지도 꽤 주고받은 듯해. 너는 청파동 살았고, 나는 계속 번동에 살았어. 내가 잠시 사귀던 남자랑 커피점에서 너랑 만나기도 했고, 네가 지금 남편이 된 사람과 연애할 때도 만났었네.
그런데 우리가 언제 소식이 끊어졌을까? 한동안 너랑 나랑 연락 없이 지냈네. 내가 조금 늦게 대학에 들어갔고 아르바이트하느라 바빠서 그랬을 수도 있어. 아님 네가 결혼해서 대학원 학업과 병행하느라고 바빴을 수도 있어. 그러고 보니까 내가 네 결혼식에 간 것도 아니고 네가 내 결혼식에 온 것도 아니네. 무얼 하느라고 둘이 다 바빴을까? 그런데 어떻게 너랑 나랑 단짝친구가 되었을까?
아, 그랬다! 우리가 여고 졸업 후 30주년이 되는 해에 '모교 방문의 해'를 하면서 친구들을 찾았었네. 그때 보고 싶었던 친구들을 꽤 만났네. 너는 동창모임에는 안 나왔고 너네 반 애들끼리 모이는 반창회는 나간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너의 반 모임에 갔었지. 정말 반가웠어. 막 눈물이 날 지경이더라. 마음속으로는 늘 너를 품고 있었나 봐.
그 후 우리는 꽤 자주 만났네. 내가 아크릴화를 그리면서 성남아트센터에서 정기그룹전을 할 때도 네가 남편과 함께 와주었고 축하금도 주었지. 언제나 밥 먹자고 연락 와서 가면 맛집에서 푸짐하게 쏘았고 말이야. 울 딸 결혼식 할 때도 넉넉한 축의금을 보내주었네. 외국에서 하는 결혼식이라 네가 와볼 수는 없었지만 너의 축하와 축복은 차고 넘쳤어.
H야,
너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의사로 키웠으니 남부럽지 않을 거야. 부모한테 받은 사랑에 비례해서 아이들이 자란다고 믿는 사람이라서 가능하면 온전한 사랑을 주려고 애썼다고 했지. 사랑을 쏟은 만큼 아들이 잘 자라주어서 얼마나 뿌듯할까? 직업도 전문직이지만 부모말을 거역한 적도 없고 꽤 효성스럽다고 했지.
너하고 얘기하다 보면 너나 나나 남아선호사상이 있는 집에서 자라서 너는 오빠들한테 치이고, 나는 남동생들한테 밀려서 서운한 점이 많았더라. 그래도 우리가 어엿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잘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가 생각해 봐도 대견한 일이지.
최근에 내가 그림책을 냈다고 하니까 네가 카톡으로 축하금을 쏘아 주어서 깜짝 놀랐어. 어떤 친구들은 책에 사인해서 보내주기를 바라는데 넌 달랐어. 물론 고마운 이들에게는 내가 책을 보내주겠다고 해도 사서 본다면서
한사코 거절을 했지. 책을 내봐야 인세라는 게 거의 10% 내외 수준이라서 수천 권, 수만 권이 팔리기 전에는 수입이라고 하기에도 좀 뭐 한 거긴 하더라고. 책을 내는 사람들이 단지 수입을 위해서는 아니겠지만, 그림책을 내본 소감은 그랬어. 노력에 비해서 너무 보상이 적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좋아하고 의미 있는 일이니 계속하는 걸 거야. 나 역시도 그러하고. 네가 보내준 그림책 출간 축하금은 아주 유용하게 썼어. 꼭 보내드려야 할 사람들에게 내 그림책을 사인해서 보내줄 수 있었지.
최근에 너랑 만나서 밥 먹으면서 내 그림책 두 권을 들고 갔었네. 너와 예비 며느리에게 사인해서 주었지. 네가 맞이할 며느리감이 마침 우리 대학 후배라고 해서 반가웠어.
아들 결혼식 하는 날 기쁘게 가볼게. 물론 네가 내게 해준 만큼 다 보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축하와 축복을 듬뿍 담은 축의금을 들고 갈 거야. 선남선녀 아들과 며느리는 당연히 최고 멋지고 예쁠 거고, 하객들 맞이하느라 한복을 차려입은 네 모습이 얼마나 고울지 기대를 해보네.
H야,
너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든든해지는 내 단짝친구야. 언제나 건강하고 소소한 행복이 머무는 집, 너의 가정, 그리고 새로운 예쁜 보금자리를 이루어 아들 딸 낳고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아갈 아들 며느리 가정, 미리 축하하고 축복해. 곧 아들 결혼식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