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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이공키로미터 Jun 12. 2022

도서관 이야기#1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담임선생님이 각자 본인의 꿈을 이야기하라는 과제를 주었고, 아이들은 교실 앞에 나와 그들이 되고 싶은 꿈을 이야기했다. 50명쯤 되던 반 친구들은 선생님, 의사, 과학자를 이야기했는데, 나는 도서관 관장이 꿈이라고 말했다. 선생님과 반 친구들은 뭔가 생뚱맞은 표정이었지만, 책을 가까이하게 하셨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던 나는 서점, 도서관 같이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유난히 좋아했다. 오래된 책에서 나던 독특한 냄새와 조용하지만 묵직한 특유의 도서관만의 분위기, 그리고 책을 읽다 출출해질 즈음 도서관 매점에서 먹던 우동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나를 매료시킨다.


주로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는데, 책 종류도 많지 않고, 시설도 그다지 좋지 않아 가끔은 버스를 타고 도시가스 폭발사고로 지금은 없어진 아현동의 마포도서관까지 갔다. 그때 학교 도서관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책은 그때 그 책이 왜 초등학교 도서관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언플래밍의  "007 살인번호"였다. 당시에는 공공도서관 입장료가 있었는데 부담되는 돈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얇은 종이로 된 입장권을 손에 쥐고, 열람실에 들어가 천천히 책의 이름을 읽어본다. 뭔가 신비롭고, 어려워 보이지만 멋진 문구들은 어린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제목에 이끌려 꺼내본 책을 펼쳐보면 신비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또 하나 기억나는 장면은 열람식 책상의 온갖 낙서들이다. 주로 성적인 내용의 지저분한 낙서들이었는데, 어찌만 크고 많던지.. 그리고 어떤 것은 너무나 노골적으로 잘 그려져 있어 몹시 흥미롭게 보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림 잘 그리던 선배도 학생 때 그런 류의 낙서를 엄청 그리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학년이 높아지면서 좀 더 먼 곳의 도서관을 찾아다녔다. 정원이 넓고 남녀가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열람실이 있었던 정독도서관, 석양이 지는 장면을 열람실에서 바로 볼 수 있었던 용산도서관, 언덕에 있어 올라가기 꽤나 힘들었던 서대문도서관. 각 도서관마다 꽤나 많은 추억과 기억이 묻어 있다. 특히 용산도서관에 관한 기억이 선명하다. 고등학생이 되고, 주말마다 책 보다 문제집을 풀기 위해 도서관에 갔었는데, 용산도서관을 가장 많이 갔었다. 그 이유는 바로 석양 때문이었다. 열람실에서 공부하다 저녁시간이 되면 붉고 따스한 기운이 열람실에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한다. 공부에 지친 난 그 기운에 이끌려 문득 열람실 너머 창밖의 세상을 본다. 탁 트인 서울 시내가 보이고, 석양으로 물들기 시작한 열람실은 기묘하고 신비로운 다른 공간이 된다. 난 공부를 잠시 멈추고, 그 순간을 음미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그때 느꼈던 그 기억과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 받은 그 어떤 붉고 따스했던 기운이 지금까지 나를 이끌고, 지금 여기에 있도록 만든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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