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보다는 개인, 단체활동의 가치보다는 개인 사생활을 존중해주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시각은 바뀌어갔다. 그래서 그런 걸까? 사람들이 원하는 컨텐츠 또한 여행, 일상 브이로그나 소장품을 소개하는 왓츠인마이백, 왓츠인마이캐리어 등 개인의 이야기를 내포한 것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왜 남의 가방 속 사정이 궁금할까? 문득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음, 그것은 아마 개인과 개인이 만난 단체라는 집단이 개인을 존중해주면서 개인이 또 다른 개인을 궁금해 하고, 나와 다르다는 지점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고, 나는 누리지 못하는 타인의 일상을 컨텐츠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새로움을 느끼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내 공간을 빌려(내 공간을 내가 빌린다는 말 자체가 희한하긴 하지만) 이 유행 선상의 끝무리에 합류해보고자 한다. 내 가방 안에는 어떤 것들이 나뒹굴고 있는지 점검해보는 시간 또한 함께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달리 특별한 게 들어있을 것 같진 않지만.
0. 가방
가방은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에 구매한 키르시의 작은 백팩이다. 당시에는 아이패드와 책을 달고 살았던 지라 가방이 항상 가볍지 않았고, 한쪽으로 매는 가방만을 가지고 있던 터라 소지품을 모두 넣고도 여유로운 사이즈의 백팩을 사고 싶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남자친구와 신세계 백화점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중, 키르시의 대표적인 마크인 빨간 체리가 시야에 훅 들어왔고, 이끌리듯 옷과 모자를 구경하던 내 손끝에 이 가방이 닿았다.
10만원 정도의 적당한 가격대와 단단한 재질, 무엇보다 오른쪽 구석에 박힌 체리 마크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1년 정도 출퇴근뿐만 아니라 갖가지 일상 활동 중 들고 다니며 먼지가 약간 내려앉았지만, 잔고장이나 뜯어짐 없이 제 기능을 잘 해주고 있다. 오락실 사격 경품으로 딴 수달 인형 키링과 올해 서울국제도서전 기념 도서 기념품인 '책' 글자 뱃지를 부속품처럼 달아 두었다.
1. 에어팟
세상과의 소음을 격렬히 차단하고 싶은, 그리고 음악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내게 에어팟은 정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에게 분리불안이 있듯, 나 또한 내 가방 안에 에어팟이 없으면 분리불안이 생긴다.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고 싶다거나, 듣던 노래가 입 밖으로 흘러나오거나, 다리가 떨리거나. 사실 많은 사람들이 줄 이어폰이 에어팟으로 그 형태가 변화할 때까지 꾸준히 그것들을 소지해왔을 것이겠지만.
케이스는 같은 백화점 바로 옆 케이스티파이에서 구매했다. 은색 빛 케이스에 검은 글씨로 새겨진 영단어에서 느껴지는 힙한 뉘앙스에 덥석 이것을 집었던 것 같다. '마틴 킴'이 브랜드명이라는 것은 방금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남자친구는 내 에어팟 케이스를 볼 때마다 '마틴 킴'은 누구냐는 재미없는 질문을 반복하곤 한다.
2. 이클립스 복숭아 맛
에어팟 다음으로 꼭 가지고 다니는 소지품이 있다면, 이클립스이다. 무조건 복숭아 맛. 다른 맛도 이모저모 먹어보았으나 달거나 신 맛이 강한 걸 썩 좋아하지 않는 내게는 이 플레이버가 원픽이다. 처음에는 껌을 씹으면 턱이 사각 턱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껌을 대체할 용도로 구매했다. 한 알 한 알 먹을 때마다 느껴지는 은은한 복숭아 맛과 화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일을 하다가 잠이 오거나 집중이 되지 않을 때마다 한 알, 대중교통 안에서 입 안이 텁텁해지면 또 한 알, 바깥에서 외식을 한 후 찝찝함이 느껴지면 또 한 알, 그렇게 습관적으로 집어넣다보니 어느덧 3일에 한 통을 비워내는 신기록을 달성했다.
지인들과 고기를 먹거나 술을 먹고 나온 후 자연스럽게 달그락거리는 이클립스 통을 꺼내들면, 너나 할 것 없이 내 주위로 모여들어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동성 친구나 동생들은 어미 새에게 먹이를 얻어먹고자 하는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려댔다. 나는 익숙하게 손 위에, 입 안에 한 알 한 알을 건네주었고, 오물거리며 먹는 그들을 보며 픽 웃어보였다. 누군가 말했다. '야, 센스 좋네. 이런 것도 챙겨 다니고.' 가끔 가다 옆 사람에게 너도 저런 것 좀 들고 다니라는 둥 장난스런 핀잔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아 한 번 더 픽 웃었다.
통이 비워질 때마다 '엑, 벌써 다 먹었네.' 하고,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 카운터 앞에 나란히 진열된 분홍색 작은 깡통을 집어들었다. 2+1을 한다는 문구가 붙어있다면 말성이지 않고 3개를 한 손에 집어들었다. 다이어트를 하고 있던 중 문득 통을 뒤집어 영양성분표를 확인했다. 무설탕, 85칼로리. 앞으로도 안심하고 이 알알들을 계속 삼켜도 괜찮을 것 같다.
3. 지갑
전 남자친구와 이별 후, 선물받은 브랜드 지갑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 장만했던 질스튜어트의 반지갑이다. 안에는 자주 쓰는 카드들과 지인들의 명함, (현) 남자친구의 증명 사진, 소액의 지폐 등이 들어있다. 지폐를 접어서 지갑에 보관하면 돈이 안 들어온다는 속설이 있다던데, 나는 그런 속설을 잘 믿지 않는다. 카드 3개를 장지갑에 넣어두고 많은 칸을 빈 상태로 두는 것보다 지폐를 접어 다니는 게 여러 모로 편할 것 같아 반지갑을 계속해서 고수 중이다.
매끈한 질감, 검은색과 빨간색의 조화, 포인트로 달린 보석 모양 고리, 깔끔하게 박힌 질스튜어트 이름, 전반적인 디자인과 그 디자인으로부터 나오는 무드가 마음에 들어 구매했었다. 3년 정도 꽤 오래 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언젠가 비싼 브랜드의 지갑을 장만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서랍에 잘 보관해두고 종종 안부인사를 물을 것만 같다.
4. 책
이름과 표지는 나날이 달라지지만, 공통분모는 소설로 귀결되는 책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 요즘 다시 독서에 맛이 들려 출퇴근 30분 사이 지하철에서, 퇴근 후 집에서 쫌쫌따리 읽다보니 2,3일 만에 한 권을 뚝딱 해치울수 있게 되었다.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 김영하 작가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를 순식간에 완독하고, 고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좋아했던 기욤 뮈소 작가의 <인생은 소설이다>를 막 읽기 시작했다.
간 밤에 잠을 설쳐 일어나는 것조차 너무 고단했던 날, 지하철에서 못 잔 수면 욕구를 보충할 때를 제외하고는 집중해서 책을 읽는 편이다. 같은 칸에서 나처럼 독서를 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곤 한다. 그렇게 한 권을 완독한 후 그 책의 여운이 길게 남았을 때에는 서평을 작성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가끔 그런 내 모습을 돌아볼 때마다 꽤나 갓생을 사는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든다.
퇴근 후, 외출 후 화장대 옆이나 침대 위에 대충 내던져두던 내 가방 속 미지의 공간. 유튜브에 출현한 연예인들의 왓츠인마이백 콘텐츠와 비교하면, 내 것에는 정말 특별한 것이 없는 듯하다.
가방 속 물건을 죽 훑어본 김에, 소개한 물건들 외 잡다한 것들을 정리하고, 물건이 나뒹굴면서 뿜어낸 먼지들을 깨끗이 닦아내었다.